▲ 현 각

원주 성불원 주지스님
불교의 공부 중에 참선수행은 어려운 과정의 하나로 지금도 전국의 선원에서는 생사를 걸고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화두(話頭) 타파(打破)는 참선수행의 핵심이다. 예부터 천칠백개의 화두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가 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의문이다. 모든 현상과 생명은 소멸(消滅)과 죽음이라는 하나의 관문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소멸과 죽음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의문이다.

삼라만상이 갖가지 형태로 생겨나고 성장하고 유지하다 마침내 소멸에 이르게 된다. 뭇생명들도 탄생하고 성장하며 그리고는 죽음의 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최후에 이르는 길을 열반(涅槃)으로 정의하였다. 욕망도 분노도 어리석음도 모두 사라진 평화롭고 가장 평온한 상태에 이르는 길이다. 이는 말로서 이해되기보다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전 원주에서 타계하신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은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남기신 글에서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심정을 토로하셨다. 그리고 그 무엇도 생명의 가치보다 우선 할 수는 없다고 하신 말씀이 대작가의 내면세계와 그 분의 삶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우리는 흔히 죽음은 허망하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렇게 왕성하던 활동들도 이루고자 하는 큰 뜻도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죽음은 이생의 모든 짐을 벗어놓고 다음으로 전이(轉移)되는 것이며 그 삶의 내용에 따라서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빛나게 되는 것이다. 붓다나 예수, 공자와 같은 성인의 삶이 그러하고 많은 선지자들의 삶과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평화로운 삶을 모색하던 생명들이 이 세상의 빛으로 전해지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이다.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이의 삶이 조화롭고 평화로우며 사회와 세상에 이익이 되는 삶을 살았을 때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얼마전 중국에서 로마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일부를 다녀왔다. 실크로드는 협곡과 사막을 지나고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산맥을 수없이 넘어야 하는 험한 길이며 수많은 사람이 길위에서 죽음을 맞기도 했던 죽음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다른나라 정복을 위해 군대가 지나가기도 하고 돈을 벌기 위한 상인이 지나가기도 하며 진리를 구하기 위하여 구도자들이 지나가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현장법사와 신라의 혜초스님 같은 분의 발자취는 지금도 우리의 기억속에 생생하다. 짧은 생애를 살아왔어도 그 분들이 남긴 인생의 여운은 갈수록 빛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말은 누구를 위하여 살았는가 라는 말로 반문해 볼 수 있다.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하여 살아온 길과 다른이와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살아온 이들의 평가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크다.

자기 자신은 고통과 어렵게 살아왔으면서도 더욱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거금을 희사하고 장학금을 기증하는 그리고 이름조차 밝히기를 꺼리는 분들의 고귀한 정신이 우리를 깨우쳐 주는 교훈이다.

지금 지구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중국의 지진, 미얀마의 홍수 등으로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잃고 살아가는 힘을 잃어버린 이들의 고통이 연일 뉴스가 되고 있다. 이들의 아픔을 우리도 함께 느끼고 아파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되고 향기있는 삶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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