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규

감리교 남선교회동부연회 연합회장
1703년 6월 28일 영국 엡워드교구 목사 사무엘웨슬리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난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이다. 존 웨슬리가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된 것은 그의 어머니 수산나의 종교교육의 영향이 크다. 규칙적인 생활이 어려서부터 몸에 배어 있었음을 그의 일기장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는 런던의 차터하우스중학 6년을 나온 후 옥스퍼드대학교의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서 공부 한 뒤 성직의 길을 걸어왔다. 존 웨슬리는 22세인 1725년 9월 19일 당시 옥스퍼드 감독인 피터로부터 집사직 안수를 받았고 그는 3년 뒤 사제안수를 받고 설교하기에 이른다. 1729년 타락한 영국을 바로잡고자 동생 찰스웨슬리와 뜻있는 청년 세 사람이 모여 홀리클럽(holy club)을 조직하였다. 그는 이 조직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홀리클럽 성경연구의 첫 열매는 구제운동이었다. 이때 기록을 보면 “90파운드 수입 가운데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6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 하였다”는 기록을 보고 나는 크게 감동 받았다.

그리곤 그의 끝없이 타오르는 종교적 정열로서 완고했던 당시 영국교회의 안일주의와 의식을 박차고 믿음의 요람인 옥스퍼드대학교의 교수직을 사직하고 북 아메리카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1738년 2월 1일 영국으로 돌아온 후 경건주의자 침례파인 모라비안교도들과 신앙교제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1738년 5월 24일에 웨슬리는 중생(회심사건)하는 기쁨을 체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올해(2008년)는 웨슬리 목사의 회심 270주년을 맞는 해로 그 의미가 더 크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옥외 집회를 많이 하였다. 그때 찬송에 힘썼으며 ‘만입이 내게 있으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구주여 크신 인애를’ 등 6000여 편을 지어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는 예배를 통하여 전도에 힘썼다고 런던에서 약 200 ㎞ 거리에 있는 브리스톨시 소재 웨슬리채플(뉴룸)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1742년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속회라는 셀 선교조직(약 12명으로 한 팀)모임을 통하여 매주 한 번씩 간증과 성경공부를 통하여 감리교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 한 것이다.

존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까지 88세로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분주하고 많은 일을 했다. 영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4000번 이상의 설교로 선교여행을 무려 40만㎞나 했다고 기록되었다. 이러한 존 웨슬리의 영향을 받은 한국감리교회는 아직도 철저한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인 면에서 보면 존 웨슬리적이지 못한 요소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사회적 성결운동을 강조한 존 웨슬리 신학사상을 올바로 알고 이해 할 때에 더 건전하고 성숙한 한국교회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다시 돌아볼 때 한국교회의 영성이 더욱 성숙해야 함을 다시한번 절감해 본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