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백운

춘천 석왕사 주지
현대인은 바야흐로 정신적 위기에 봉착해 있다. 서로 존중해야 할 인간은 자기소외속에 불신과 갈등 대립과 반목 폭력과 약탈을 자행한다. 마치 세계는 아비규환의 대암흑의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모든 인간들이 본래 참된 자기 자신을 잃고 있다. 사람들은 무명과 욕망에 사로잡혀 탐진치 삼독의 불길을 끝없이 치솟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광명등 아래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무구한 불성의 등불을 밝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종이로 만든 등에 촛불을 밝히는 것처럼 켜면 켜지고 불면 꺼지는 그러한 등불은 아니어야 한다. 이것은 돈을 주고 살수도 없고, 팔수도 없는 것이어야 한다. 오직 그것은 믿음만으로서만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옛날 인도의 사위국 프라세나짓 왕은 석달 동안 부처님과 여러 스님들을 공양하였다. 또 수만개의 등을 켜서 연등회를 베풀었다. 그때 밥을 빌어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한 여인이 프라세나짓왕의 연등회를 구경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가난하여 아무것도 공양 할 것이 없지만 등불하나라도 켜서 부처님께 공양 하리라” 떨어진 누더기를 팔아 동전 두닢을 얻어 기름을 마련하고 불을 켜 올리면서 또 말하였다. “보잘 것 없는 등불이오나 이 공덕으로 오는 세상에 저도 부처님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원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다른 등불은 모두 꺼졌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등불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등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부처님께서 주무시지 않으실 것이므로 아난다는 그 불을 끄려고 하였다. 부채를 들고 바람을 일으켰으나 종내 꺼지지 않았다. 입으로 불고 손으로 문지르고 가사자락으로 휘 둘러 보아도 끝내 불이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부질없이 애쓰지 말라. 그것은 가난하지만 마음이 착한 여인이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켠 등불이다. 그러니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등불의 공덕으로 그 여인은 다시오는 세상에서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 밝은 법등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힐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은 ‘근본일체유부경’에 있다. 마음이 밝으면 나라도 밝아진다. 마음의 등불을 밝혀서 삼독번뇌를 제거하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하자.

등불은 곧 불교의 자비, 지혜, 해탈, 선정, 재생을 포함한 정각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달마 관심론에 이르기를 “일체 해탈을 구하는 사람은 항상 몸으로서 등대를 삼고 마음으로서 등잔을 삼고 믿음으로서 심지를 삼고 모든 계행으로서 첨유를 삼으라”고 하였다.

또 “불빛은 지혜가 밝은 것에 비유한 것이니 항상 이와 같이 깨달음의 등불로서 마침내 끝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가난한 여인의 등불처럼 거기에는 우리들의 간절한 소망과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 있다. 부처님을 향한 가식 없는 찬미의 불빛이어야 할 것이다. 또 우리자신들의 각등(覺燈)을 개발하여 중생의 어두움을 사르는 지혜의 등불이어야만 하겠다.

등불을 켜는 것은 부처님의 출현이 어둡고 컴컴한 이 세계를 비쳐주기 때문이다. 등불은 3000년 전 부처님이 이땅에 오심을 되새겨 보고 오늘 우리 인류의 밝은 생활을 염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불교의 목적은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에 있다. 나도 참답게 되고 남도 참답게 되어 온 세계가 참다워질 때 보람있는 인간의 삶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연례적이고 관습적인 연등행사가 오직 나만을 위하고 내 가족만을 축복받게 하는 행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등을 밝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밝은 마음으로 사회의 등불을 켜나가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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