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식 논설실장
자유시장 정신이 이 시대에 세상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지금 그 반대 생각을 얘기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판단하여 한 말씀 올린다.

교회는 사람들을 죄인이라 전제해 놓고 모든 말씀을 공포한다. 왜 교회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보는가? 절에서는 사람을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은 짐승이란 뜻도 담긴 어휘다. 어찌하여 절은 사람을 짐승으로 이해하려 하는가? 철학자 니체는 인간을 ‘병든 짐승’으로 불렀다. 도대체 니체는 우리가 무슨 병에 걸렸다 하는가?

그 이유 혹은 답의 요체가 될 수 있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죄인이라거나 짐승과도 같다거나 병들었다거나, 하여간 인간이 뭔가 큰 잘못을 범했다는 이런 생각은 깨달음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무슨 깨달음인가? 인간이란 불치의, 고칠 수 없는, 아니 고치려 하지 않는 그야말로 절대적 본디적 병이 있는데 그게 바로 욕망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욕망을 억제하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죄인이요, 짐승이요, 병든 짐승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깨달음이다.

이 인간의 비난받아 마땅한 욕망을 부추기는 생각이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다. 인류가 떠올린 가장 좋지 않은 생각 중 하나가 욕망의 성취를 높은 가치로 올려놓은 바로 시장 이데올로기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얼마 전에 강릉단오제가 끝났다. 옛날과는 사뭇 달라진 형식으로 진행된 강릉단오제에선 그 어떤 일탈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예전엔 품바도, 야바위꾼도, 사기꾼도 있었지만, 이런 놈들이 횡행하고 다녀 아이들에게 단오장에 가지 말라 당부하기도 했지만, 이번 것은 잘 기획된, 아무 사건 사고가 없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행사 혹은 행사장이었다.

그런데 서글픔이 야금야금 필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 까닭을 스스로 떠올려보니, 다름 아니라 야바위꾼 등이 기생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질서 때문이었다. 강릉단오제는 이미 카오스 곧 무질서에서 느낄 수 있는 해방 공간의 그 자유 또는 자유의 종을 난타할 혹은 만끽할 여지가 없는, 전통의 그 ‘난장’이 없는, 딱딱한 코스모스 곧 견고한 인위적 질서의 메마른 공간으로 변질돼 있었던 것이다.

욕망이 문제이듯 질서 또한 적잖은 문제를 지닌다. 욕망이 성공을 향해 인간을 막무가내로 내몰고 있듯 질서 또한 그 일사불란(一絲不亂)의 속성으로 인해 무질서가 주는 자유로움을 완전히 무시한다. 일방통행이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오직 욕망의 성취 그리고 질서의 유지가 우우거리고 와와대며 일방으로 통행할 때 욕망의 억제 또는 무질서의 자유는 저층 혹은 하류로 매도당하고 마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유의 생각의 편재(偏在)에 소름이 돋는다 하는 말이다. 오직 성공만을, 너무 질서만을 강조할 때, 뒤안길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가눌 길 없어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있을 턱이 없다는 점에 몸이 떨리더라 하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 욕망과 권력에 의해 지어진 질서와 성공과 일방적 우세와 부와 돈과 성취와 승리만을 찬양하며 이루어라 이루어라를 스스로 거듭 거듭 소리쳐야 한다는 책들이 적잖이 팔려 나간다 하여 필자는 겁나고 무섭고 쓸쓸해지고 우울해진다.

최고 최대가 돼야 한다는 거대주의, 마땅히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성공 지상주의, 인격을 물질로 저울질하는 황제의 논리, 곧 매머니즘(mammonism)의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물신의 시대와 그 시대정신 따위에 필자의 몸이 와들와들 떨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고 하여 오해 없기를 바라면서 지적하는 예컨대 이런 책들. ‘39세 100억, 젊은 부자의 부동산 투자법’이란 책, 종교 교리를 외피 삼은 ‘긍정의 힘’ 그리고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크릿’이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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