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 기 성

춘천중앙감리교회 봉사담당 목사
1930년대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사람들이 모두 어렵다고 하고 죽겠다고 할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불황보다 더 두려운 존재는 두려움을 갖는 생각이다 ”라고 말했다.

요즈음 경제가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어렵다고 하는 경제지표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두려움이다. 우리들 안에는 두려움의 지뢰가 곳곳에 있다. 과거에 남모르게 행했던 거짓이 탄로날까봐 두려워한다.

현재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두려움이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된 열심으로는 행복을 영원히 찾을 수 없다.

자녀를 기를 때도 두려움을 그 아이에게 넣으면 안된다.

훈육은 필요하지만 훈육의 도구를 두려움으로 사용하지 말아라. “너 오늘 아빠한테 맞아 죽을래?” 너 한번만 더 그러면 밖에 버린다” 교육의 도구로 두려움을 사용한다면 결국에는 아픔이 있을 것이다. 사람을 다스리는데 두려움을 사용하면 그 순간은 말을 잘 듣는다. 그러나 그 때가 지난 후에는 성장도 행복도 없다.

그럼 두려움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사랑이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다. 두려움은 죄로부터 온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만이 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라의 곳곳에서 옳고 그름을 가르기 위해서 싸운다. 이익을 위해 싸운다. 그 싸움에 사랑이란 없다. 그러니 마음은 더욱 메마르고 돌아서면 숨겨둔 두려움이 더욱 커진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하는 모든 것 앞에서 “이것이 사랑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것이 맞는가 틀린가? , 이것이 이익인가?”만을 묻고 산다면 성공이라는 밑빠진 독에 물을 계속 부어대는 열심과 같다.

한 사람이 얼음 창고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안타깝게도 시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크게 상심한 그는 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비추며 얼음 창고 톱밥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동료들도 이것 저것을 들추며 열심히 찾았지만 시계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에는 시계를 찾지 못하고 점심식사를 하러 나갔을 때 한 소년이 그 창고에 조용히 들어갔다. 그리고 시계를 찾았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놀라움에 가득 차서 어떻게 시계를 찾았느냐고 물었다. 작은 아이는 대답했다.

“아저씨 저는 그냥 톱밥 위에 아무 소리도 안 나게 조용히 앉았어요 그러자 곧 시계가 째각째각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위 이야기의 어른처럼 오늘은 분주하고 요란한 마음을 내려놓자. 그리고 소년처럼 조용하고 고요해 보자. 그 때에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이것이 사랑인가?”라는 물음이 시계소리처럼 떠오른다.

이것을 목사인 나는 기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랑인가?”질문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개인도 가정도 강원도의 미래도 “이것이 맞고 틀린가? 이익인가?”만을 묻는 메마른 승리자보다 ‘이것이 사랑인가?”를 물으면서 사는 이들을 통해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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