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기선

천주교 춘천교구 후평동성당 주임신부
낙태는 태아를 모체 안에서 죽이는 끔찍한 행위이다. 인위적으로 조산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결과는 같다. 태아를 죽이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대로 태아를 죽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태아가 인간인가 아닌가의 문제에 귀착된다. 인간이라면 낙태는 어미가 자식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어머니 뱃속에 든 아기는 아직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체와 분리되어야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머니 뱃속에서 지내는 10달 동안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받아들이기 참 어려운 주장이다. 최근에 22주된 태아가 조기 출산되었으나 병원에서 건강한 아이로 퇴원하게 된 예도 있다. 22주 3일 만에 세상에 나와 가장 일찍이 사람 대접받은 셈이다.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면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결심했다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말이다. 참 웃기는 논리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우리나라 모자 보건법 14조는 임신 28주 이전의 태아는 여러 가지 구구한 이유만 있다면 낙태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연간 34만 건의 낙태가 자행되고 있다. 처벌하지 않고 있는 불법낙태의 통계까지 합치면 150만 건에 이른다. 세계 1위이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죄스러워 얼굴도 들지 못할 일이다.

보건복지가족부가 모자 보건법 14조항을 개정하고자 공청회를 개최하여 각계의 주장을 들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개정안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실망스럽다. 특히 그 내용 가운데 임신부가 요청하면 24주 이내에는 ‘사회 경제적 사유’로 합법적 낙태가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다.

요컨대 사회적 이유, 즉 미혼이기 때문에 그리고 기혼이더라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임신부가 결정하면 24주 이내에는 언제든지 합법적으로 낙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임신을 장려하며 임산부와 태아 그리고 유아의 건강을 도모하기 위해 존재하는 주무부서의 입법 개정안이 이 정도라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도대체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이를 보존하기 위한 성스러운 노력의 흔적이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삶의 편리를 위해서라면 말 못하는 태아의 생명을 멋대로 유린할 수 있다는 방자한 태도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낙태로 말미암아 파생될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숙고의 흔적은커녕 오히려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치열하게 걸어야 할 멀고 험한 길이 눈앞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선진국에서는 선거 때만 되면 입후보자의 삶의 철학을 묻는다. 그 때마다 낙태 찬성(Pro-choice)과 낙태 반대(Pro-life)가 매우 큰 이슈가 된다.

지난해 미 공화당 대선후보 가운데 부동의 1위였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지사가 낙태 찬성 입장을 밝혔다가 지지율이 급락했다. 그는 올해 대선 예비선거에서 탈락했다. 이제 우리나라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높은 감각을 지녀야 될 시점에 왔다. 수태되는 순간부터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와야 한다. 최근 자연과 생태환경의 중요성이 경제논리와 맞물려 강조되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 생명 존중의 철학을 갖는 것이다. 그 철학에 따라 사람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낙태하는 것과 지나가는 어린이를 살해하는 것이 똑같은 범죄로 취급되는 사회가 하루 빨리 오길 소망한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