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연 소설가
선생님, 지난여름은 그 어느 여름보다 뜨거웠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촛불이 있었지요. 어느 시인의 시처럼 매일 밤 수많은 어머니들이 촛불로 밥을 지으셨던 것이었지요. 작은 바람이라도 훅 불면 꺼져버릴 촛불로 밥을 짓다니요. 여름 내내 저는 그 거룩한 행동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웠지요. 진정으로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듯 촛불로 밥을 지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가을 초입, 세상은 꺼진 촛불에서 피어나는 매운 연기를 놓고 다시 왈가왈부하고 있네요.

선생님, 보수가 있고 진보가 있다고 하네요. 여당과 야당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만이 아니겠지요. 같은 길에서 갈라지고 만나기를 거듭하는 게 우리네 인생사라는 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네 삶이라는 게 끝없이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향해 욕설과 돌멩이를 던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만 같아 우울합니다. ‘잃어버린 십 년’을 되찾아 보답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치적 마음들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민주화 운동의 적자라는 기억에만 매달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무관심한 정치인도 한심합니다. 맹목적으로 그들을 따르는 마음들 또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대체 정치는, 정치인들은 왜 아직도 저만큼 뒤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며 끊임없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는 것일까요. 읽어야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더 사랑해야할 애인들이 마음 졸이며 서성거리고 있는데, 새로 심어야할 나무들이 이름표를 반짝이며 웃고 있는데. 그런 꿈들을 가진 우리들마저 싸움에 끌어들여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게 원래 정치라고요?

그때그때마다 부침을 달리하는 여당과 야당의 지지율을 눈여겨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지율에서 재미난 것을 발견했지요. 어느 쪽도 과반을 넘기지 못하는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었지요. 권력을 잡으려면 필수적으로 상대편 지지자들이 아닌 그때의 정세나 후보자의 인품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는 부동표(浮動票)를 잡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부동표. 부동층. 선생님, 감히 말씀드린다면 저는 부동층의 흔들리는 마음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아닌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급할 때마다 양쪽의 지지자들이 보내는 구애와 멸시의 시선을 꿋꿋이 견디는 그들에게 남몰래 박수를 보낸 적도 있지요. 그들의 실패와 성공이, 그리고 성찰이 진탕 속의 개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한 방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들이 바로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고집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껏 그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았던 부끄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양쪽의 절벽 끝에서 배수진을 치고 있는 이상 엄밀하게 말해 진보와 보수는 상대방을 진정으로 껴안을 힘이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자만과 모순, 부패를 눈치 채지 못하거나 모른 척 눈감아 줄 때 늘 그러했듯이 우리는 결국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건강한 부동층의 성장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선생님, 원효를 더듬거리는 밤입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아직 원효가 말하는 고통의 바다를 헤엄치는 장님 물고기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요. 원효는 말합니다. 깊고 넉넉한 바다는 어떤 물은 깨끗하니까 받아들이고, 다른 물은 더러우니까 배척하는 그런 택일을 하지 않는다고. 모두 품안에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진정시켜 맑은 물로 정화한다고. 오직 차이와 동거하는 평등론자의 융화만이 담연하다고. 제가 부동층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이것인데, 아직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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