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응철

고성 대진고 교사
60년대 9월 초순부터 새벽 눈만 뜨면 밤나무 아래로 눈을 비비며 가서 밤을 주웠다. 지금처럼 여유롭게 한두 개 줍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마치 밤줍는 쟁탈전이란 말이 더 실감된다. 어둠이 아직 퇴각하지 않는 새벽부터 동네 아름드리 밤나무 밑에서면 풀과 밤을 구별하기 힘들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보이지 않던 알밤이 풀섶에서 반긴다. 그 때 얼마나 반가웠던가!

자기 집에도 한 두 그루 밤나무가 있긴 하지만, 대개 주인 없는 동네 밤나무 밑을 헤맨다. 요즘 밤은 대개가 개량종이라 밤이 굵지만 예전의 밤은 거의가 토종밤이라 알이 작다. 밤알은 잘지만 반질반질 윤기가 나고 맛이 특이하게 고소하다. 지름밤 고소밤이라고 부르던게 생각난다. 밤이 어찌 고소하고 달착지근한지 풋밤을 따서 먹다가 그만 입으로 껍질을 벗기고 껍질 다음에 밤에 붙어있는 껍질을 벗기며 퉤퉤하다가 옷에 묻으면 세탁하여도 물이 들어 부모님한테 혼이 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무렵이면 특히 청소년들이 접칼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수시로 깎아먹는다. 풋밤을 비롯해서 참외 서리한 것, 돌팔매질해서 딴 돌배, 고구마는 물론 길옆에 심은 빨간 감자도 생으로 먹고 학교 뒤 실습지에 심은 뚱딴지도 깎아 먹으며 배를 채우곤 했다.

절대 빈곤시절의 허기진 배를 채우던 유년기 시절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새벽부터 밤을 주우면 대개는 장에 가는 어머니 편에 내다 팔아 돈을 환불받거나 생필품을 사온다. 밤을 쪄서 실에 주렁주렁 꿰어 장바구니에 넣어 장으로 가지고 간다. 공업이 발달안 된 농업사회라 푸성귀나 농산물들을 내다 팔아야 시골에 잔돈푼이 생긴다.

밤은 특히 내겐 강한 추억의 손잡이가 아닐 수 없다. 마당 끝 터밭 둑에 아름드리 밤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밑에서부터 두 줄기로 뻗어 올라간 밤나무는 누가 언제 심었는지는 모르지만 토종인데도 품종이 여간 우수하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밤이었다. 왕밤이었다. 해마다 그 밤나무는 특히 시골에서 두어 마장 되는 시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내게 교복을 선사하던 나무였다. 매일 떨어진 알밤을 모아 논다. 밤을 판 돈으로 내 겨울 검정 차이나 칼라 교복을 사 입었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그루터기만 있는 밤나무를 확인하고 향수에 젖곤 한다. 야생 산밤이 있긴 하지만 여행을 하다가도 밤나무가 있는 곳이면 인적이 있어 포근하다. 다른 어느 꽃보다 특이하게 긴 줄로 피어 늘어진 밤나무는 어느 유실수보다 우리 인간과 같이 자라온 것이리라. 잎만 보면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와 비슷하지만 밤나무 밑에서면 아름드리 표피에서 다른 나무에서 느낄 수 없는 푸근한 정을 누구나 느낄 수 있으리라. 오늘도 어김없이 가을의 낭만과 추억을 안겨준 알밤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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