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백운

불교태고종 강원교구 종무원장

(춘천 석왕사 주지)
붓다는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난 분이셨다. 붓다의 눈은 인간 자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 2500년 전의 인도인이건 현대의 우리들이건 그 눈에서 벗어남이 없다. 이러한 붓다의 시선에서는 욕만 먹어야 하는 사람, 또는 오직 칭찬만 들어야 하는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한 드라마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특히 고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는 악인과 선인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관중은 그 드라마 속에서 악인이 득세하여 방자하게 날뛰는 것을 가슴 죄면서 보고 있을 것이다. 선인은 처음 불리한 처지에 놓여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인가 넘기게 된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선이 승리하면서 관중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게 된다. 소위 권선징악의 드라마의 대부분이 이러한 구조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드라마는 인간의 일상생활의 일부를 추상화하여 그것을 과도하게 강조한 픽션일 뿐이다.

일상생활에의 인간성은 드라마처럼 한 면만이 강조되지 않는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그것조차 사실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행동은 상황에 따라 선이라 칭하기도 하고, 때로는 악이라 하여 배척되기도 한다. 이는 시대에 따라 또는 사회에 따라 평가가 서로 엇갈리는 것만 보아도 명백한 일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가치나 그 평가는 결국 상대적임을 면치 못한다는게 성립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일방적·일률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현대와 같이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는 여론이라는 것이 굉장한 폭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인해 가치의 기준을 간략히 하고 획일화하려는 경향이 생기기도 한다. 여론이 만들어낸 가치처럼 흔들리기 쉬운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시적인 어떤 분위기가 세상을 덮어버려 누구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론은 또 다시 이동하기 마련이다. 만약 그것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혼자 뒤에 처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바라보는 대신 현재에서 평면적으로 바라본다 해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여론은 앞에 든 드라마의 예와 같아서 단순하게 선악을 갈라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여론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기실 주체의 상실 이외의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소위 죄인이라 해서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들 속에도 고귀한 인간정신을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선하기만 한 사람이나, 악하기만 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고난 성인도 없는 반면 타고난 악인도 없다는 이런 인간이해 위에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불교 명제가 성립하고 있음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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