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백운

태고종 강원교구 종무원장

(석왕사 주지)
무한히 뻗은 하늘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며 흐르는 흰구름에게 길을 내주는데 인색하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펼쳐진 땅은 만물이 의지하며 사는 터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한정하려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을 관념적인 수준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알고 보면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과 땅을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하늘과 땅은 역연하되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게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해가 바뀌어 새 달력을 건다고 해서 새로운 인생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맞이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 갈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어떻게 되지 않겠어?” 하는 식의 적당한 태도를 취하는 한 개혁할 만한 여지가 전혀 없는 것과 같다.

보통은 성취에 대한 특정 기준을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범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설정한 목표치를 달성하게 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자못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나 혹은 입시 등 나름대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채워 보려는 바람이 있는 한 아쉬움은 오늘의 것이 아님과 동시에 오늘에 이루어진 충족이 내일까지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서고 가능하질 않다.

여기서 우리는 크나큰 모순과 만난다. 부족함을 채우려는 신행 양태를 당연시하려는 입장에서 본다면 굳이 더 이상 믿음의 길로 매진한다는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는 생각지도 않고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만 무조건 매달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영하의 기온일 때 온도계에 입을 바싹대고 입김을 불면 눈금은 올라간다. 그렇다면 올라간 눈금만큼 방안이 따뜻해진 것인가. 마찬가지로 자신이 처하고 있는 현실이 변하지 않는데도 눈앞에 보이는 계기만 올라가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실제로 체감하고 있는 감각은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적인 추위가 더 느껴질 뿐이다.

우리들의 신행생활이 이와 같이 춥고 배고픈 정도에 머물고만 있다면 제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따뜻한 분위기는 결코 연출되지 않는다. 미리 설정한 잣대 앞에서 전전긍긍할 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항상 부족하기만 하다는 규정이 있는 한 끝없이 불안하고 언제까지나 쫓기며 살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살아 온 날들은 과연 그렇게 부족하기만 했을까. 부족하다는 말에서 “예전에는 만족하였는데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상실한 것을 미처 채우지 못한 아쉬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본래부터 있었던가. 무(無)로 태어났으나 온갖 성취로 가득찬 게 인생의 속내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실제 상황인 것이다. 제대로 알고 보니 더하거나 빼거나 할 것도 없이 언제나 채워지기만 하는 날들이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세월에만 해당되는 진실이 아니다. 지금 숨을 쉬고 이 순간에도 채워짐이 끊이지 않고 있는 삶이다.

부족을 따질 새가 없다. 부족함을 떠올리며 자신의 불행을 탓하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는 삶의 진실은 본래부터 그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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