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흰 눈을 좋아하는 민족인것 같다. 겨울이면 내내 눈 속에 묻혀 살면서도 TV나 영화에 나오는 알래스카의 설경을 보기라도 할 때면 그 장면에 정신없이 도취되는걸 보면 더욱 그렇다.

이곳 진동계곡의 설피마을은 동양의 알래스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다. 설악산 높은 대청봉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겨우내 쌓인 눈이 쉽게 녹지를 않는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제설차가 도로관리를 위해 항시 대기 근무를 하고 있어 폭설이 내려도 차량통행에는 지장이 없지만 들판과 산에는 허리높이 만큼의 눈이 쌓인다.

섣달 보름을 전후로 보름달이 설피마을 골짜기 산위로 둥실 떠오르는 밤이면, 이제는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길목에서 잠이 많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산자락을 덮고 있는 흰 눈위로 희다 못해서 푸른 듯이 쏟아져 내리는 달빛에 취하여 밤새 잠을 잊은채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기도 한다.

며칠전 대구에서 이 마을 눈구경을 하고 싶다며 남녀학생들 여남은명이 찾아와 민박을 하게 되었다.

겨울철이라 봄부터 가을까지 무성하던 꽃도 나뭇잎도 다 져버려 볼거리가 없어 스산하다며 미안해하는 내게 오히려 눈에 묻힌 산 속 마을의 적막한 분위기가 좋다고들 하였다. 밤이 늦도록 잠도 안자고 앞마당에 몰려나가 뒹굴며 눈싸움도 하고 좋아라하는 모습들이 어찌그리 청순하고 사랑스럽던지…. 언덕위의 비탈진 밭머리에서 비닐비료포대를 깔고앉아 썰매를 타고 신나게 내리달리며 깔깔거리는 그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좁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꾸밈없이 밝고 곱기만한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내 어린시절의 겨울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1·4후퇴때쯤 민가가 불에 타고 잔해로 남은 지붕함석조각을 끊어다가 서너명의 아이들이 한조가 되어 눈밭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미끄러져 내리곤 했었는데…. 모든 것이 궁색하고 놀잇감이 부족했던 그 시절이나 여러 가지 오락문화가 풍요롭게 넘쳐나는 지금이나 흰 눈과 함께하는 겨울의 낭만은 모든이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가 보다. 이제 소한이 지났으니 곧 대한이오고 입춘도 머지 않았다. 이 깊은 골짜기에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하얀 눈쌓인 설피마을의 겨울풍경을 마음속의 화폭에 오래오래 담아두고 싶다.

이상우·인제군 기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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