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식

논설실장 misan@kado.net
‘고사관수(高士觀水)’라는 말이 있다. ‘뜻이 높은 선비가 물을 관조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한사관수(閑士觀水)’와 대구를 이룬다. 하지만 이 말을 ‘한가한 선비가 물을 관조한다’라는 당초의 의미보다는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노라면 바쁘던 마음도 한가해진다’로 해석하는 편이 더 낫다. 이를 잘 알면서도 선비가 아니어서는 물론이지만, 요즘 물을 바라보면 마음이 한가로워지기는커녕 가슴이 먹먹하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수년 전에 일본의 물 연구가 에모토 마사로가 물 결정체를 카메라로 찍었는데, 헨델의 음악을 틀어놓고 찍었더니 물은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 같은 결정체를 이루었고, 아, 무섭게도 ‘죽이겠다’는 쪽지를 붙여 놓고 찍었더니 물은 결정이 깨어지면서 매우 기괴한 모양이 되었다 한다. 물에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놀랐다 하는데-.

우주적 기(氣)의 존재를 믿고, 그 기의 원리에 의해 물 또한 어떤 변화를 읽어내는 존재라 가정해 본다면 에모토 마사로의 주장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 겨울 가뭄이 들고 봄 가뭄으로 이어진다 하여 실제로 심한 갈증을 느끼며 더욱 그런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감정이 있는 물이 드디어 사람을 외면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이 왜 하필 태백산 주위에서일까? 특히 태백산록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마음이 간특해서인가, 하면 절대 아닐 것이요, 강원도 사람이 패덕하여 물이 반란을 도모하나, 하면 옳다 할 수 없다. 아니, 강원도 백두대간 그리고 태백산 기슭에 사는 사람만큼 원만 풍후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또 어디 있겠나. 그러하니 특히 강원도 남부 지역 주민들이 이렇게 목말라 해야 할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이 문제에 관한 고민 뒤에 내려 보는 결론은 이에는 필유곡절, 그것이 그런즉 하나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하는 점이다. 곧 ‘태백산’에 주목하게 되는데, 왜 하필 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하강하여 세운 신시(神市)가 태백산이었던가 하는 얘기다.

신화 속의 태백산이 어디인지는 아직 답이 없다. ‘동국여지승람’의 저자는 태백을 황해도 구월산이라 하고, ‘삼국유사’는 태백을 묘향산이라 한다. 다른 수많은 논자들이 송화강 아사달이다, 백두산이다 하고, 강화도 마니산, 중국 서북방의 산, 심지어 우리 민족의 출발지라 믿어지는 저쪽 알타이산이다 하며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에 오직 강원도 태백산이 홀로 그 이름을 온전히 지켜올 따름이다. 오늘 날 태백산의 의미는 어떠한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터가 마련된 것을 비롯한 많은 의미망 중 한반도 중남부 모든 강의 발원지이라는 뜻이 주목된다. 한강의 발원지를 오대산 우통수로 보지만 태백시 창죽동 금대산 동쪽 계곡이라기도 한다. 낙동강의 발원지도 태백시 화전동 천의봉 동쪽 계곡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하나의 상징을 태백산에다 내렸을지 모른다. 이를 테면 너희들 축복된 물의 행성에 살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물을 철저히 ‘죽이겠다’ 하느냐, 벌을 주노니 수원지여 목이 마를 지어다, 이 우주적 순환의 논리를 한반도 사람들은 깨달을 지어다, 하고 말이다. 이것과 비슷한 동양적 사고의 틀로 한해 한발의 죄업을 세종대왕은 이렇게 토로했다. 이 엄청난 한발의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마음이 아프고 낯이 없어서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

‘우주의 근원이 물’이라던 탈레스, ‘누구도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던 헤라클레이토스, ‘위대한 신은 물과도 같으시니 애쓰지 않고도 쉬 만물을 먹인다’ 하던 노자 등의 물에 대한 통찰적 해석보다 가뭄으로 갈증을 느끼는 이 땅 모든 사람들은 고답하고도 한가로운 고사관수나 한사관수가 아니라 지금 세종의 정치성을 넘어선 너무도 인간적인 면목 없음의 그 통회(痛悔)에 마땅히 숙연해져야 한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은. misan@kado.net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