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성탄절이나 설날이 가까워오면 뭇사람들의 시선이 경쟁이라도 하듯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향하듯 해마다 장애인의 날이 가까워오면 뭇사람들의 시선은 장애자 보호 수용 시설이나 재활원으로 쏟아진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장애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그들의 권익을 찾아주고, 비장애인들이 범유했던 그들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고, 그들의 복지정책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며 말이다. 그러나 마치 장애자를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장애인 만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일수록 꼭 그 열정만큼 쉽게 내가 언제 그랬냐는듯 돌아서 버리는것 같은 인상을 줄 만큼 장애인의 날 바로 다음날 부터는 신문도 방송도 그 많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인사와 지방유력 유지들까지도 내년 장애인의 날을 기약하며 장애자의 날 그 언약과 다짐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 같다.

장애자, 그들이 누구인가?

어쩌면 그들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장애자의 90%가 후천성 장애자라는 통계를 보면 나도 장애자 일 수 있다는 조금은 떨떠름한 가정이 그리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십건씩 발생하는 산업 현장의 재해 그리고 교통사고, 가스, 전기로 인한 화재 그리고 각종 안전사고에서 결코 나만은 예외일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장애자! 그들을 위한다고 갑작스럽게 수선을 피는 일은 결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관심을 가지고 인정하고, 지켜보고, 손을 내밀면, 잡아줄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

그들은 결코 동정을 원하지 않는다. 장애자를 위한 갖가지 혜택과 시설이 잘 갖추어진 나라에 비하면 그들의 입지는 너무나 힘겹고 어렵지만 그들은 묵묵히 해내고 있지 않은가!

장애자가 장애자를 돕는 정녕 아름다운 모습을 우린 가끔 보고 듣는다. 자신의 수입에서 일정액을 별도로 떼어 장애자를 돕는 일에 쓰겠다는 장애자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듣고는 장애자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지 못한다면 이는 정녕 도덕 불감증 장애중에서도 극히 증세가 심한 장애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정상인도 힘겨워하는 험준한 산을 정복하는 모습,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장한 장애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있는가! 따지고 보면 우린 모두 장애인이다. 다만 그 정도가 약하거나 그 부분이 숨겨져 있거나 아직 그 형태를 장애의 영역으로 구별하지 않아서일 뿐이다.

장애인 그들 중에는 비 장애인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큰 일을 해내고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신 분들이 너무도 많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였으며, 헤밍웨이도 이탈리아 전선에서 다리를 다친 장애인이요, 낭만파시인 바이런도 절름발이요, ‘마지막 잎새’의 저자 오우 헨리도, 헬렌켈러도, 베토벤도 장애인이었으며 그 밖에도 소아마비 소녀가 육상선수로, 축구선수가 생물학교수로 변모하며 장애를 극복해 가는 장한 모습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모두가 가슴마다에 커다란 교훈을 심어주었다. “우리도”가 아니라 “우리는”할 수 있다. 해냈다는 불굴의 의지를...

일년 삼백예순 닷새가 장애인의 날이라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인제 월학초등학교 고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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