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세훈

화천 원천감리교회 담임목사
예수는 중생(重生), 즉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물과 바람을 등장시킨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개념을 설명할 때에 물과 바람만큼 적절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바람에 관해서는 그 특징을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사람이 인식하지 않고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듯, 거듭난다는 것 역시 인위적인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종교는 그래야 한다. 굳이 종교인으로서 덕을 쌓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규범 안에서 처신하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본능적으로 신앙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요, 참된 종교이다. 이를 예수는 ‘바람’으로 설명하고, 노자 선생은 ‘무위(無爲)’라는 말로 표현한다.

두 번째, 물은 양면성을 지닌다. 그것은 대단히 형이하학적이면서, 형이상학적이다. 모든 물질세계에 근원을 제공하지만, 철학을 비롯한 종교에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잘 알듯이, 고대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탈레스는 만물의 근본을 ‘물’이라고 말했다. 이 언급 속에 담긴 그의 생각은 아마도 동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물로 이뤄졌고, 그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었을 게다. 종교적으로도 물은 대단히 중요하다.

첫째, 물은 자유롭다(無爲自然). 물은 구름이 되어 하늘을 날기도 하고, 바다가 되어 쉬기도 하고, 강물처럼 흐르기도 하고, 샘처럼 솟기도 한다. 물은 천태만상으로 변하여 우리가 보는 어느 공간에서나 자유롭게 산다. 그래서 물에는 거침이 없다. 거대한 돌이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스르르 그 옆을 흘러 제 갈 길을 간다.

둘째, 물은 언제나 겸손하고 다투지 않는다(謙下不爭). 물은 언제나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그야말로 겸손하다. 더 낮은 곳이 있다면 더 낮은 곳을 향한다. 그리고 그 누구와도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다. 그를 껴안고 그를 품고 그를 받아들일 뿐이다.

셋째, 물은 스스로 깨끗하며, 다른 것까지 깨끗하게 한다(淸淨恬淡). 그래서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물을 필요로 한다. 또한 물은 스스로를 깨끗이 정화할 줄 안다.

넷째, 물은 죽지 않고 오래 산다(長生不死). 물은 수 억 년 전의 물이 바로 그 물이요, 지금 우리가 마시고 보고 쓰는 물은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마셨고,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마셨고, 조선의 이순신 장군이 마셨던 바로 그 물이다. 물은 변치 않는다. 늙지도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물을 물 쓰듯 쓰는 사람들은 모두 죽지만, 물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예수는 사람이 바람처럼, 물처럼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람을 수도 없이 대해 본 우리가, 물 없이는 살지 못하는 우리가 아직까지 거듭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혹시 기도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산 위에 올라가서, 언덕에 서서, 또는 바닷가나, 강가에 나가서 살뜰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가슴으로 들이키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살기 때문이 아닐까. 드리는 예배의 횟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우물 속에다 ‘아’ 하고 소리치면서 우물물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던 그 순진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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