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동열

삼척주재 취재부국장
엊그제 삼척 정라동에서 ‘삼척포진 영장(營將) 고혼제’라는 행사가 열렸다. 올해 처음으로 주민 화합잔치와 병행해 소박하게 개최된 행사였기에 그리 떠들썩하게 주목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동해의 격랑을 헤친 선인(先人)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하는 동해상 해상 강역을 ‘우리땅’이라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행사가 지닌 의미와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정라동 삼척항 일원은 삼척포진이 자리잡았던 수군(水軍) 유적지다. 고려말 우왕 10년(1384년)에 설치된 삼척포진은 조선 고종35년(1898년)에 해체되기까지 강원도와 경북 동해안 등 영동지역의 수군 중심기지 역할을 했다.

514년간 삼척포진을 지휘했던 만호(萬戶)와 첨절제사(僉節制使), 토포사(討捕使) 등 수군 영장들은 모두 62명에 달한다. 그들이 단순한 벼슬아치 였다면 우리가 오늘 ‘고혼제’까지 지내면서 혼을 기리지는 않을 것이다. 삼척포진의 영장들은 지긋지긋한 왜구(倭寇)들의 약탈과 살육에 맞서 동해안을 지켰고, 더 나아가 울릉도와 독도 등지의 수토(搜討)임무를 맡았던 주역들이었다. 조선은 왜구들로부터 섬 주민들을 보호하고, 병역 등의 의무를 피해 섬으로 사람들이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태종때부터 울릉도 등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육지로 불러들이는 쇄환(刷還)정책을 쓰고 비정기적 수토를 하지만, 저 유명한 ‘안용복 사건’이 터진 이듬해인 1694년(숙종20년)부터는 1∼2년 걸러 한번씩 정기적으로 관리들을 울릉도 등지에 파견해 섬의 형세와 사정을 살피는 등 적극적 도서 관리 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때 수토관으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삼척포진의 영장들이었다. 거친 항해를 해야 하는 등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수토는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가면서 하는 형태로 진행되지만, 어디까지나 그 중심에는 삼척영장이 서 있었다. 실록과 향토사료에는 삼척영장들의 수토 행적이 줄지어 등장하고, 지금도 동해안과 마주보는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가면 수토관들이 남긴 석각(石刻)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토 항해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2∼3시간이면 울릉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요즘에나 할 수 있는 얘기다. 전적으로 무동력 범선에 의존해야 했던 당시의 항해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사료를 살펴보면 세종 때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됐던 삼척사람 김인우(金麟雨)가 폭풍을 만나 46명이 탄 배 1척을 잃고 돌아오자 세종이 “죽은 강원도 수군의 초혼제를 지내도록 했다”는 내용도 보이고, 성종 때 삼봉도경차관(三峯島敬差官)으로 임명됐던 박종원의 경우도 병선 4척을 잃고 표류하는 악전고투 끝에 다시 돌아왔다는 내용 등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후기 수토관들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수토에 동원된 수십∼수백명 군사와 식량, 자재 등도 모두 동해안 현지에서 조달해야 했기에 고충이 더 심했다. 이런저런 각종 고충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군이 되려는 자가 없어 수군은 아예 세습을 하도록 하기도 했으니 그 시대 수군들의 족적이 더 크게 보인다.

삼척영장 고혼제가 열린 이튿날, 울릉군에서 자매결연 교류 협의를 위해 삼척시를 방문했다. 삼척영장과 수군들이 목숨을 걸고 오간 바닷길을 통해 역사문화·관광 교류의 새 물꼬가 터지고 있는 것이니 ‘우리땅 독도’를 위해서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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