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년간 삼척포진을 지휘했던 만호(萬戶)와 첨절제사(僉節制使), 토포사(討捕使) 등 수군 영장들은 모두 62명에 달한다. 그들이 단순한 벼슬아치 였다면 우리가 오늘 ‘고혼제’까지 지내면서 혼을 기리지는 않을 것이다. 삼척포진의 영장들은 지긋지긋한 왜구(倭寇)들의 약탈과 살육에 맞서 동해안을 지켰고, 더 나아가 울릉도와 독도 등지의 수토(搜討)임무를 맡았던 주역들이었다. 조선은 왜구들로부터 섬 주민들을 보호하고, 병역 등의 의무를 피해 섬으로 사람들이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태종때부터 울릉도 등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육지로 불러들이는 쇄환(刷還)정책을 쓰고 비정기적 수토를 하지만, 저 유명한 ‘안용복 사건’이 터진 이듬해인 1694년(숙종20년)부터는 1∼2년 걸러 한번씩 정기적으로 관리들을 울릉도 등지에 파견해 섬의 형세와 사정을 살피는 등 적극적 도서 관리 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때 수토관으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삼척포진의 영장들이었다. 거친 항해를 해야 하는 등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수토는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가면서 하는 형태로 진행되지만, 어디까지나 그 중심에는 삼척영장이 서 있었다. 실록과 향토사료에는 삼척영장들의 수토 행적이 줄지어 등장하고, 지금도 동해안과 마주보는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가면 수토관들이 남긴 석각(石刻)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토 항해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2∼3시간이면 울릉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요즘에나 할 수 있는 얘기다. 전적으로 무동력 범선에 의존해야 했던 당시의 항해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사료를 살펴보면 세종 때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됐던 삼척사람 김인우(金麟雨)가 폭풍을 만나 46명이 탄 배 1척을 잃고 돌아오자 세종이 “죽은 강원도 수군의 초혼제를 지내도록 했다”는 내용도 보이고, 성종 때 삼봉도경차관(三峯島敬差官)으로 임명됐던 박종원의 경우도 병선 4척을 잃고 표류하는 악전고투 끝에 다시 돌아왔다는 내용 등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후기 수토관들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수토에 동원된 수십∼수백명 군사와 식량, 자재 등도 모두 동해안 현지에서 조달해야 했기에 고충이 더 심했다. 이런저런 각종 고충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군이 되려는 자가 없어 수군은 아예 세습을 하도록 하기도 했으니 그 시대 수군들의 족적이 더 크게 보인다.
삼척영장 고혼제가 열린 이튿날, 울릉군에서 자매결연 교류 협의를 위해 삼척시를 방문했다. 삼척영장과 수군들이 목숨을 걸고 오간 바닷길을 통해 역사문화·관광 교류의 새 물꼬가 터지고 있는 것이니 ‘우리땅 독도’를 위해서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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