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백운

태고종 강원교구종무원장

(석왕사주지)
행복이란 무엇인가. 고래로 이에 대해 해명을 시도한 사람은 하나둘이 아니거니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행복이란 심신충족의 상태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일시적일 때는 진정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행복이란 영속적인 심신충족의 상태라고 정의함이 좋겠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은 원래 무상한 것이며 드디어는 죽음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걸머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최대의 염원인 행복은 언제나 배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간 최대의 비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건강이나 재물이나 사람이 영속하는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이 어떤 파탄을 가져올 때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하고 울부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생활의 실태며 생사윤회라고 표현되는 미혹의 모습인 것이다.

대승의 ‘열반경’은 행복 최대의 적인 죽음에 대한 문제를 깊이있게 들어갔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느끼는 가장 큰 의문은 사후에도 생명이 존속하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 어떤 형태건 생명이 존속할 것을 바라고 영생할 것을 믿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생명존속의 염원을 깨뜨려 버리기도 한다. 바로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는 생각이다. ‘열반경’은 이 두 가지 생각을 전자는 생의 한 변(邊)에 집착하는 것이요, 후자는 ‘사(死)-무(無)’의 한 변에 집착하는 것이라 하여 양쪽이 다 같은 차원에서는 그릇된 생각이라 비판하고, 생(生)과 사(死)는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하나를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릴 수 없으며 포기나 초월은 양자의 포기·초월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만 영원한 것이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해 성행품에는 ‘자매공구’라고 불리는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날 부자인 어떤 사람이 절세의 미인을 만났다. 이름을 물었더니 ‘공덕대천’이라고 하며 재물을 불리는 구실을 한다는 대답이다. 주인은 겅중겅중 뛸 듯이 좋아하며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그 뒤에 또 한 여성을 만났다. 얼굴은 아주 추했고 때투성이었다. 이름을 물었더니 ‘흑암’이라 하고, 재물을 소멸시키는 구실을 한다는 대답이었다. 부자는 펄쩍 뛰면서 칼을 뽑아들고 위협을 했다. 그러나 그 여성은 태연히 대답했다.

“당신은 어리석군요. 앞서 당신이 집안으로 맞이해 간 것은 내 언니요. 그리고 나는 늘 언니와 같이 있게 되어 있소. 만약 나를 쫓아 버리고자 하면 우리 언니도 같이 쫓아야 하오.”

그래서 부자는 집으로 들어가 공덕대천에게 사실여부를 물었다. 공덕대천이 사실이라고 하자 한참을 망설이던 부자는 둘 다 쫓아버렸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설화다. 여기서 언니는 생을 비유한 것이요, 동생은 죽음을 견준 것이니, 이 비유담으로 생이 있으면 사가 있으며, 생사는 언제나 함께 붙어 다녀서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고, 나아가서는 생만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세상 사람들의 그릇된 견해를 시정하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설화는 다시 계속돼 자매가 가난한 집을 찾았더니, 그 집의 여인은 두 명을 기쁘게 맞아들였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살 희망을 잃고 절망하여 죽음에 빠져 버린 니힐리스트를 비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자매공구’의 비유는 생에 집착되는 것이나 죽음에 집착되는 것이나 다같이 미혹이며 생사를 함께 버리고 초월하는 곳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 영원은 생사 어느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를 초월한 곳에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같이 생사를 해명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며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닐바나 즉 영원의 경지는 이 생사 초월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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