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단장(斷腸)’이라는 말은 원숭이에서 유래됐다. 진(晉)나라의 한 병사가 삼협(三峽)에서 새끼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왔다. 그런데 그 원숭이 어미가 배를 좇아 백여 리를 뒤따라가며 슬피 울다가 죽고 말았다.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더라는, 다들 잘 아는 이야기이다.

거의 자살과도 같은 이런 일례뿐 아니라 극심한 스트레스의 탈출구를 찾으려다가 바다 동물들이 스트랜딩(stranding)에 빠져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일도 있다. ‘스트랜딩’이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경우를 이른다. 이따금 고래 떼가 해변에서 죽었다는 뉴스가 난다. 동물들의 이런 죽음을 자살로 보면서도 과연 이것이 사람의 자살과 같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슬픔과 불안 등의 감정이 있을지언정 동물의 그것과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른 자살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남은 문제는 누가 풀어야 하나

▲ 논설실장
사람의 자살이라-. 일본 사람이 이걸 마다 않는다. 그것이 주군(主君)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이든, 조직을 위한 책임의 드러냄이든, 제국주의적 집단 광기이든 하여간 일본인은 흔히 할복을 한다. 이타적 자살이니, 하면서 때론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는 일본인들의 자살 코드는 이러한데,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기본적으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여 자살 부정론이 우세했다.하지만 우리에게 명분 있는 의리 자살, 정치적 철학적 자살이 적지 않았고 또 권장되기까지 했다. 명문가의 미망인 며느리가 자살에 이르는 특히 조선조 사대부 집안의 수많은 예가 그러하고,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해병대에 의해 광성 포대가 함락 당하자 조선 병사들은 양오랑캐에 더럽히느니 죽는 게 낫다며 줄줄이 포대 앞바다에 투신, 바람에 진 꽃잎처럼 흘러갔다. 이들은 저 당나라 군병을 피해 스스로 떨어져 갔던 낙화암의 궁녀들을 따랐던 것이다. 아, 금강에서 논개는 또 어떠했던가. 자살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살이 분명 인간 사회의 한 문화일 수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주장한다. “우리는 죽음의 본능(thanatos·타나토스)이 자기 보존의 본능(eros·에로스)보다 우세한 문화에서 살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자살은 절대 평가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도대체 이 무슨 광란이더냐. 이를 보고 떠오른 건 세기말의 집단 자살이다. “지구를 떠나 고차원의 세계로 간다.”며 미국 센디에이고에서 사교 집단 ‘천국의 문’ 신도 39 명이 음독했다. 이후 수많은 종말론자들의 죽음. 캐나다에서의 ‘태양의 사원’, 남미 가이아나에서의 인민사원 사건 그리고 우리나라의 오대양 사건 등.

수십 명의 집단 자살을 가져온 이 무모한 사건이 재연되는 듯한 최근의 자살 사태에 전율한다. 그리고 특히 죽음으로 고단한 인생의 짐을 벗어 던진 자들을 애도는 하되 찬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들 자학적 생의 섬뜩하고도 완전한 함몰을, 한 세계의 전면적 적멸을 그 누구인들 또 어떻게 미학적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문제 해결의 최후 방안으로 생명을 스스로 없애는 행위는 절대로 용인될 수 없다. 주목하라. 인간학적으로는 물론 사회학적으로 바로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당사자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사라진다 하여도 바로 그런 문제 해결 방식이 타인의 문제, 사회의 문제로 남기 때문이다.

자, 거듭 말해 보자.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가버린 지금 남은 문제는 무엇인가. 충격적인 동반 자살, 집단 자살의 광기가 강원도 땅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듭 생겨나고 있는데, 이 어찌 죽은 자 뒤에 남아 있는 산 자의 문제가 아닐 수 있느냐 하는 말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지금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는 중이다.



최근 잇단 집단자살 전율

잠시 성당(盛唐) 시절의 호방한 시인 이백(李白)을 떠올린다. 그를 세상에선 시선(詩仙)이라 이른다. 아니, 이백 스스로 자신을 신선이라 여겨 젊은 시절에 아호를 ‘적선(謫仙)’이라 했다. 적선이란 저 ‘신선 세계에서 살다가 황정경이란 도교의 경전을 잘못 읽어 우리네 땅으로 귀양 온 신선’이란 뜻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산중(山中)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였다. 이백은 호남성 안릉(安陵), 안휘성 남릉(南陵), 산동성 동로(東魯) 등지에서 적지 아니 지냈다. 이는 곧 이백이 한반도의 산이 많은 마치 강원도 같은 곳에서 신선처럼 살았다는 얘기다.

다른 곳의 사람들이 강원도에 와선 이백처럼 신선적 삶, 유유자적한 생활을 해야 한다. 차안이 괴로움이 있다면 피안의 땅, 산자수명한 강원도로 건너와 꿈을 꾸며 살아야 옳다. 그리고 우리 선인들은 은둔자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정적 숙청의 귀양지 중 하나이기도 한 강원도에서 실제로 피신하거나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결코 자살 따위는 생각지 않았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선생은 명주 땅 옥계에 귀양 와서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하는 희망찬 시를 읊으며 지내지 않았는가. 이런 경우는 헤아릴 수도 없으니, 서울 출생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관동의 동서남북을, 특히 양양도호부의 설악산에서 짧지 않은 시절을 보내며 수많은 글을 짓는다. 정송강(鄭松江)도 그러했고,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도 뒤지지 않았으며, 경기도 연천 출신 미수 허목(許穆) 선생은 삼척을 무척 사랑하였고, 여기서 위대한 역사책도 엮는다. 우왕이 강릉으로, 공양왕이 원주로, 단종이 영월로 오고, 이전에 마의태자가 금강산을 찾아드는 등, 아, 전두환 전 대통령도 그랬고, 그것이 기존 세력으로부터 밀려난 것이었든 귀양이었든 일단 강원도를 밟게 되면 이 땅의 사람들은 지난 일을 성찰하고 현실을 철저히 느끼면 특히 앞날의 재기를 꿈꿨던 것이다. 이런 곳이 강원도인데, 오늘날 여기 와서 어찌 죽으려 드는가 말이다. 삶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고 삶의 에너지를 마침내 받아야 할 곳, 생명을 힘을 소망을 희망을 모색 도모해야 할 마지막 이상향, 한반도 최후의 샹그릴라(Shanri-La)인데, 도대체 지금 여기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느냐, 어떻게 이런 집단 죽음의 광란을 벌일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강원서 휴식·안녕 찾길

바라노니, 다시 강원도를 주목하라. 강원도는 살아 있는 생명력이요, 대한민국 국민 다수의, 그야말로 국민적 상식의 컨센선스로 이름 붙여진 ‘한국관광 1번지’이다. 그 미래 가치의 국가적 효용성 측면에서 요즘 강원도엔 ‘국토 중심부론’이 얘기되고 있다. 따라서 거듭 개탄 강조하지만, 이 강원도가 어찌 죽어야 할 땅이던가 말이다. 그렇게 자살함으로써 강원도의 상징성과 이미지를 흐려 놓는다면 한반도의 허파, 마지막 남은 자연성의 고도인 강원도는 그들의 주검처럼 정말 굳어갈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

다시 바라나니, 실존적 현실 혹은 당위가 어쩌다가 죽는 쪽으로 향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오늘날 무수한 상대적 가치의 혼돈 속에서 사는 한, 그리하여 정답이 아닌 하나의 해답을 찾아가는 가시밭길이 인생인 한, 이를 인정할지언정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라. 더구나 그 환경이 빼어나서 차라리 죽음을 떠올릴 지경이라 하여도 강원도에 이르러서 죽음의 광란에 동참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인생을 존재론적으로 다시 한 번 충분히 사유해 볼 것을 권한다. 당신 또한, 아니 특히 당신은 강원도의 산천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운 하나의 완벽한 우주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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