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의 요즘세상

▲ 이광식

논설실장
정치 또는 선거 얘기가 나오면 고전적이지만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떠올리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연상된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셔야 했던 이유는 체제를 비판했다는 것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보편적 지식을 가르치려다 오해를 받아 사형된 것이다. 스승의 죽음을 목격한 플라톤이 그리하여 아테네 식 민주적 정체를 의심하게 됐고, 결국 뭘 좀 ‘아는 사람’ 곧 ‘철학하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소크라테스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죽지 않으리란 믿음을 갖게 된다.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전적으로 옳다는 식의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정치 철학이 대중의 뜻을 거스를 ‘정치적 엘리트주의’로 비판받는다는 점에서 크게 권장할 아이디어가 아니기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선거 시즌이 오면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떠오르는가.

철학자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이 경우 대중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측면에서, 박제된 듯한 강단(講壇)의 학자가 아니라 생활 현장의 지식인이 철학자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런 시각 아래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곧 ‘지식인정치’라 하여 무방하고, 우리 전통 문화 속에서 이를 ‘선비정치’라 하여 지나치다 할 수 없을 듯하다. 탄탄한 성리학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왕권을 견제하면서 백성의 아픔을 대변해 주던 그 선비 말이다.

이 대목에서 강원도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자. 강원도의 이면을 캐보면 굴욕적 정치 지형이 튀어나온다. 역대 권력이 국가 차원의 ‘균형’을 논했으되, 깊이 따져보면 저 삼국시대 이래 ‘영호남의 균형’일 따름이고, 특히 최근 세종시 이슈로 볼 때 캐스팅보트의 충청도 역시 균형 정책의 중액, 곧 정치적 이익의 과점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순박한’ 강원도는 ‘바보’처럼 그저 바라만 보다가 권력의 국외자로 밀려나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형국 아래 지금 강원도는 그 모순을 투철히 들여다 보는, 철학자 같은 대표자로서의 개인, 곧 모두가 주목할 후보자(들)를 등장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이를 뼈저리게 느끼는 후보자를 찾기 힘들다. 거대 정치는 물론 미시정치적 시각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강원도의 정치 구도적 굴욕을 넘을 탁월한 관점은커녕 선거에 등장한 인물들이 지난 8, 90년대의 변환을 흡수하지 못한 채 21세기를 무임승차하려는 무모한 의식을 보일 따름이다.

입지자들이 지역 현실을 꿰뚫는 실증적 검토를 거치지 않고 자신·자기 편·자당의 이익만을 유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가족적 파시즘’에 빠져 지방선거전에 부나비처럼 뛰어든다는 의혹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선거운동 중에 나타나야 할, 이를 테면 수준 높은 ‘신(新)강원인론’ ‘강원도 자기 대접론’ ‘강원도 중립 균형자론’ 같은 논쟁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검찰의 “출판기념회를 빙자한 선거운동 방식과 공무원 선거 개입에 강력한 단속” 천명을 부른 것은 무엇인가. 탈법이 담론에 앞서 선거 판을 종횡으로 휘젓고 다닌다는 것 아닌가. 강원도의 발전 지체를 깊이 사유한 어젠다를 제시하지 못하는 후보자는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런 맥락에서 후보자들은 선거 초입에 이렇다 할 논쟁 주제 하나 등장시키지 못하여 너절하고 저속하고 낯뜨거운 얘기만 생산하는 등 이 격조 낮음과 소쇄함과 지리멸렬함을 해명해야 한다. 철학자가 그러하듯 현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여 불구적 정치 지형으로부터 강원도를 탈주시킬 박진성 있는 논리를 공개적 토론을 통해 펼쳐 유권자들의 공명도 널리 얻어내야 한다. 6·2지선 중에 혼탁 선거 논란 따위는 입에 담을 필요조차 없이, 소크라테스적 희생이 그러했고, 플라톤의 정치 철학이 그러했으며, 우리 선비들 역시 그러했듯 후보자 간에 보다 ‘고급한 담론’을 펼치며 강원도의 가능성을 강렬히 제시하는 ‘철인정치’ ‘지식인정치’를 보고 싶다.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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