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 장 근

육군 15사단 군종참모 소령
지난해 봄 가족들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를 찾았을 때 일이다. 3일간 3600㎞를 쉬지 않고 달리며 미국 서부 방방곡곡을 둘러보았다. 애리조나의 찬란한 별밤과 광활한 그랜드 캐니언의 경이로움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각 도시를 대표하는 명소를 찾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중, 계획에는 없었지만 우연히 발견한 이정표를 따라 찾아간 곳이 있다. 바로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한 추모기념관이었다. 높이 솟은 깃발을 중심으로 비석들이 늘어서 있었다. 정확히 2495개의 비석. 비석에는 이름과 소속부대, 계급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60년 전, 2495명의 젊은이들은 이름도 모르고 친척도 아닌 먼 나라 사람들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들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이들을 대하고 있자니 마치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사람을 보고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생각하기 이전에 발 벗고 도왔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 역시 머지않아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먼 나라 이웃을 돕기 위해 고향 캘리포니아를 떠났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찾은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만난 2495명의 참전용사들은 속도가 최고의 선(善)으로 여겨지는 현대 사회에서 많은 것을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하게 했다.

그들은 손자 손녀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고, 인생의 황혼을 보내며 평범한 삶을 살수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소박한 인생의 꿈과 소망을 뒤로한 채 고난당하고 있는 이웃을 구하고자 기꺼이 한국 땅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삶은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희생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찾은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죽어간 젊은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잊지 말자! 오늘이라는 시간은 내가 만난 2495명의 젊은이들의 희생에서 피어난 기적의 시간이다. 비록 그 이름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스러져간 2495명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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