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봉호

동북지방통계청장
인구센서스의 역사는 오래됐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의 민수기는 기원전 1445년과 1407년 두 번에 걸친 인구센서스의 기록이다.

그래서 민수기의 영문명칭도 Numbers로 돼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탄생도 고대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인구조사령에 따라 고향에 신고하러 가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다. 센서스라는 명칭도 로마제국에서 인구조사를 책임진 센소르(Censor)에서 유래됐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인 AD 14년에는 로마 시민권을 보유한 17세 이상의 성인남자가 493만7000명이 된다는 인구센서스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의 경우는 전한(前漢) 때인 AD 2년에 5767만명이 된다는 인구센서스 기록을 한서(漢書) 지리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작년에 삼국시대 이전인 기원전 45년의 낙랑군(樂浪郡)에 대한 호구기록 목간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현재의 평양, 해주, 원산, 함흥에 해당하는 지역에 가구는 4만3845호, 인구는 28만4161명이 살고 있다는 기록이다. 이와 같이 동양과 서양 모두 오래전부터 인구센서스가 실시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옛날의 인구센서스는 그 실시 목적이 오늘날과는 달랐다.

주로 세금부과나 징병 그리고 신분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인구센서스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목적의 인구센서스 역사는 그렇게 길게 나타나지 않는다. 18세기 말에 오늘날과 같은 인구센서스가 유럽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가 1795년, 프랑스가 1800년, 영국이 1801년에 오늘날과 같은 인구센서스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이때는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는 시기로서 도시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빈곤과 질병 등의 문제가 불거진 시기였다. 이런 배경에서 ‘토마스 맬더스’는 1798년에 인구론이라는 책을 발간해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줬다.

당시 인구조사가 각광을 받은 이유는 통계조사가 사회문제점들을 통계수치로 보여줘 사회개혁의 도구로써 큰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 실시된 인구센서스는 오늘날과 같이 완전성이 높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여러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통계사적으로 볼 때 크게 활약한 두 명의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아돌프 꿰뜰레’로서 벨기에 중앙통계청장을 44년간 역임했고, 다른 한 사람은 간호사의 대부로 알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특히, 나이팅게일은 크리미아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의 사망이 전쟁보다는 열악한 위생환경 때문이라는 사실을 통계와 도표로 입증했다. 그녀가 남긴 말 중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숫자가 중요하다”와 “오직 통계연구만이 국가를 바르게 이끌 수 있다”라는 경구는 지금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적인 인구센서스로의 변모를 보이게 되는 것은 갑오개혁 2년 후인 1896년 9월 1일 호구조사규칙이 공포된 이후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날을 기려 오늘날 ‘통계의 날’이 제정되기도 했다.

지금 한창 전 국민을 대상으로 2010년 기준 인구주택총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 인구센서스를 통해 우리의 생활이 풍요롭게 되고 국가의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다. 또한 이번 센서스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중요하게 남겨질 것이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국적을 떠나 예외 없이 인구주택총조사에 동참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강원도민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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