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마을과 마을의 만남… ‘길’ 소통의 또다른 이름
바우길 등 걷는 길 개척 활발
길 역사·문화 담는 작업 필요

길 끝에 섰다. 아직 갈 길이 남았는데, ‘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석양에 노을 지듯 걸어온 발자국을 차근차근 되새김질 한다. 정겹다. 길 끝에서 자신이 밟은 길을 여유 있게 되새김질 하는 ‘느린 길’의 모습이 마치 덩치 큰 암소 같다. 걸어온 길의 흔적은 역력하다. 발자국마다 이슬이 맺히고, 빗방울이 고인다. 어떤 발자국은 바람에 실려 흐릿한 윤곽만 남았다. 그러나 바람에 사위고, 빗방울에 녹았어도 흔적은 선명하다. 그 길을 걷고 또 걸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힘의 ‘표식’이다. 길은 그렇게 남았다. 길 위에서 명멸한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길은 그 자체로 서로 이해하고 나누며 다음 세대로 쉬엄쉬엄 넘어간다. 길의 생명력이다.


 

▲ 동강길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길의 참뜻을 온몸으로 말해준다.


▶길의 가치

길이 차고 넘친다. 참 많은 길이 생기고 사라졌다. 역사로 남고, 문화로 남은 길. 고집스럽게 자신의 몸집을 부풀린 길도 있고, 새로운 역사에 자신의 몸을 스스럼 없이 내준 길도 있다. 두 가지 모두를 품은 길도 우리 곁에 엄존한다.

(사)우리땅 걷기 신정일 이사장이 뚜벅뚜벅 두발로 걸은 ‘관동대로’가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500년을 지나 현재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관동대로. 울진 평해에서 삼척~강릉~평창~횡성~원주~여주~양평을 지나 서울 동대문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신 이사장은 관동대로를 걷고 난 뒤 “역사 속 얼굴과 시대의 얼굴을 말해주는 곳이 관동대로”라며 “조선시대의 옛길은 그저 사라져간 옛길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구실을 한다. 그 길에 살아 숨 쉬는 역사와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의 애환이 얽히고 설킨 길이 관동대로”라고 말했다.

관동대로처럼 길은 쉼 없이 자신을 확장했다. 신작로에 이어 국도와 지방도 군도가 생겼고, 첨단을 달리는 고속도로와 철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빠름이다. 그러나 많은 길이 생기고, 범람한 틈바구니 속에서도 ‘사람이 걷는 길’은 용케도 생명력을 유지했다.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며 사람이 찾아들었다. ‘걷는 길’을 개척하는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 길에서 사람들은 소통과 나눔을 말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야기한다.


 

▲ 강릉 바우길.


▶소통과 나눔의 길

길의 속성은 ‘소통’이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이 마을에서 저 마을이 통하기 위해 길이 닦이고 만들어졌다.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고, 사람과 사람이 길을 통해 만났다. 그런 길이 최근들어 ‘내면의 길’로 크고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걸으며 자신과 소통하고 세상과 교류한다. 소통의 길은 짧게는 수 km에서 길게는 몇 백 km까지 이어진다.

강릉 바우길과 횡성 뚜레길,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그렇다. 북한산을 감싼 둘레길도 매 한가지다. 따지고 보면 굳이 길에 ‘소통’의 굴레를 씌울 일도 없을 것 같다.

길의 속성이 소통이니까. 강원도 길에서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는 곳을 두어 개 만났다. 동강길과 운탄길(하늘길)이다. 태백 정선 영월 평창을 넘나들며 한강의 본류를 이루는 동강은 물길 언저리에 다양한 소통 구조를 만들었다. 단순히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이 만나는 길이 아니다. 사람과 자연이 만나고, 역사와 문화가 한자리에서 만난다. 그 길이 수장될 뻔 했지만, 사람의 힘에 의해 오롯이 살아남았다. 그 길은 ‘길’이 왜 소중한지 온 몸으로 말해준다. 길이 사람과 자연과 환경과 영속할 수 있다는 믿음과 약속을 건넨다.

운탄길(하늘길)은 갈등과 아픔을 나누고 어루만지는 길이다. 그 길 위에 수 많은 아픔이 도사리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안으로 삭이고 버무려 용서하고 나누는 배려를 보여준다.

듬성듬성 할퀴어진 자국이 선명하지만 결코 사납지 않다. 오히려 바라보는 사람의 눈길조차 넉넉하게 쓰다듬는다. 그 길을 잇고 마무리하는 건 사람의 몫이다.

횡성 십자가의 길과 영월 김삿갓 길은 역사의 길이다. 역사의 한 자락이 그 길을 통해 느릿느릿 에돌아 나간다. 그 길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평창 봉평에선 이효석이 꿈꾸었던 순백의 문학과 만날 수 있고, 춘천 실레마을에선 김유정의 열정을 만날 수 있다. 모두 길 위의 만남이다. 그속에서 또다른 길을 찾는 것은 걷는자의 몫이다.<끝> 강병로 brkang@kado.net



한국의 길 어떻게 만들 것인가

 

▲ 한태희

한국분권아카데미 연구원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자원과 문화, 역사자원을 보다 쉽게 찾고, 즐기고, 체험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할 수 있는 인간중심, 자연중심, 지역중심의 걷는 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우선 걷는 길의 특성에 따라 조성, 관리, 운영에 관한 법령 및 지원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국내에서는 현재 각 정부부처, 자치단체, 민간에서 별도의 걷는 길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상호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특징 없는 수많은 길의 조성과 사업의 중복 그리고 전반적인 관리 차원에서 향후 많은 어려움을 나을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 걷는 길 조성을 위한 관련법령과 지원제도를 마련하여 조성 이전에 충분한 타당성 조사를 거쳐 길이 조성되도록 함으로써 무분별한 개발을 사전에 방지하고 조성 후에는 걷는 길의 관리와 운영 체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운영의 지속성·자생적 측면에서는 정부기관이나 자치단체 위주보다는 민간 중심의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요구된다. 18만km에 이르는 프랑스의 랑도네가 랑도네협회와 약 2만명의 자원봉사자로 운영되고 미연방법에 의해 조성된 미국의 국립트레일 또한 수많은 자원봉사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국내에도 운영 특성은 틀리나 제주올레에는 (사)제주올레가 있고, 지리산 둘레길에는 (사)숲길이 있어 이들 기관을 중심으로 지역의 걷는 길에 대한 조성·운영·관리·홍보에 이르기까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관계 정부 부처, 자치단체, 지역주민과의 연계를 이루고 있다.

관과 지자체는 걷는 길 조성에서 각종 관광 및 지역개발 사업이 연계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민간차원에서 처리하기 힘든 각종 규제 파악 및 문제해결, 행정적 절차 처리, 사유지 및 국·공유지 이용에 따른 관련 문제 협조, 인프라 구축 등에서 동반자적 역할과 함께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길조성시 가능한 10km 이하의 짧고 독립적인 길을 지양하고, 기존의 길들을 최대한 활용한 코스정비를 통하여 길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체류형 관광’이 가능하도록 조성하고 동시에 걷는 길과 지역주민의 소득창출이 연관되도록 하여야 한다.

걷는 길이 경관 중심의 길 위주로 조성이 이루어지면서 접근성·편의성이 불편함을 물론, 지역 및 농어촌 마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걷는 길을 통해 농촌마을 및 지역주민의 소득이 창출될 수 있도록 계획단계에서부터 지역자원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함께 지역 및 마을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는 걷는 길의 지속성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걷는 길의 대중화 성공여부는 남녀노소, 노약자, 장애인의 구분 없이 최대한 함께 걸을 수 있게 하는 세심한 배려에 달려있다. 걷는 길을 조성할 때부터 여행자들의 위험요소가 최소화되도록 하고 지자체 및 관계기관의 협력을 통하여 안정성을 해치는 요인들을 파악·해결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