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이 평화로운 그곳, 북망산 자락에 있지요. 불현듯 기억해 내는 세상의 뒤꼍에 없는 듯 숨어 있네요. 한생의 거푸집이 한 모금 담배연기로 스러지는 그곳, 누구든 군더더기 없는 정직한 뼈를 내놓지요.

전봇대처럼 꼬장꼬장하시던 아부지, 미군 탱크가 마을 옆으로 지나가면 작대기 들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댔어요. 농주 한 사발에 허기 채우던 당신은 일꾼 품삯도 안 나오는 마늘밭 갈아엎기도 했구요.

농사꾼 만들기 싫다고 노랑이 소리 들으며 세 아들 대학 보내주었지만, 손 비벼가며 얻은 농자금 학자금 갚을 걱정에 한밤 잎담배 말아 피웠지요. 언제나 두엄냄새 나던 아부지, 농사꾼은 죽으면 어깨와 등부터 썩을 거라더니 손톱 발톱이 먼저 문드러졌지요.

구제역이 발생하자 자식보다 더 챙기던 구릅의 어미소와 송아지를 땅에 묻어야 했어요. 당신은 마지막 여물 성찬을 먹는 소잔등 쓸어주며 그예 눈물을 삼켰지요. 저물녘 뻐꾸기 울어대면 쟁기 지고 워낭소리 앞세워 돌아오시곤 했는데.

전봇대처럼 한평생 참고 견뎌내시던 아부지, 그해 초가을 비 냄새 섞인 바람 불어오던 날, 칠순 앞두고 비로소 지게와 작대기를 내려놓았지요. 당신의 마지막 길이라 호강시켜주고 싶었지만, 안동포 수의는 차마 못하고 일반 수의로 갈아입혔어요. 향나무관은 엄두도 못 내고 삼나무관으로 모셨어요.

시외버스 터미널처럼 노상 북적이는 그곳, 관보다 곡소리가 먼저 타들어가네요. 육탈하는 순서에도 웃돈 오가는 또 다른 세상. 얼굴의 잔주름 지우고 검버섯 뺀 아부지 영정사진, 그날의 끝 차례 기다리며 희미하게 웃고만 계셨어요.

어둠을 천천히 걸치는 늙은 측백나무 밑에서 우리는 마지막 남은 돛대 꺼내 한 모금씩 깊이 들이 마셨지요. 변압기 삼형제를 가슴에 꽉 품은 전봇대 쳐다보면서

김장호·시인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