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공우

도의회 사무처장
공공부문에 행복론이 유행(?)입니다. ‘행복한 창조도시, 광주’, ‘행복한 변화, 새로운 충남’, ‘시민이 행복한 서울, 세계가 사랑하는 서울’. 이 모두 지난해 7월 새로 출범한 민선 지방정부의 시정(施政) 슬로건들입니다. 물러나셨지만, 이광재 도지사께서 내건 도정 구호도 ‘행복한 대한민국! 강원도에서 시작합니다’였습니다. 하긴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한 후보가 ‘여러분 행복하십니까?’라는 화두를 꺼내 관심을 끈 적이 있었으니, 공공의 행복론이 갑작스러운 등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우리 헌법에는 행복추구권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내심의 자유권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과연 이것이 공공정책으로 시현될 만한 문제인가 하는 데에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저 ‘정치적 선언’이겠거니 하고 간단히 보아 넘길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그 구호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과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나도 큽니다. 그렇다고 지금 그처럼 어려운 과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제 식견이 너무 부족하니까요. 단지 관심을 갖는 것은, 그 행복이란 게 과연 뭘까, 그걸 내세운 분의 행복관은 대체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란 행복해지기로 결심하고 있는 한 행복하다.” 솔제니친의 말입니다. 쉽게 이해되는 말은 아니죠?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사소한 일상들이 유한한 인생의 행과 불행을 가르는 씨앗이 된다는 주장도 있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분명 각자 나름대로의 행복관이 있을 겁니다. 그 숱한 행복론 모두를 관통하는 한마디가 있다면, 그게 뭘까요? 그것은 아마도 ‘지기(知己), 지족(知足), 지지(知止)’가 아닐까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 또 만족함을 알며,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아는 것. 이거야 말로 행복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라는 데는 그다지 큰 이론이 없을 것으로 봅니다. 모름지기 그런 사람, 그런 가정이 모인 사회가 왜 행복하지 않겠으며, 그런 사회적 풍토에 기초한 나라가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거대 담론으로 부상한 공공의 행복론도 결국은 한 개인, 한 가정의 행복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안다면, 왜 저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세계의 일류 국가들을 모두 제치고 단연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적 담론으로 행복을 내세우신 분들의 행복관도 역시 ‘지기, 지족, 지지’의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점에서는, 세상 보통사람들의 그것과 과히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기에 더욱 관심을 갖는 까닭은, 한 필부의 생각과 다르게, 한 사회의, 한 나라의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철학이, 그 사회에, 그 나라에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소에 사는 쥐와 곳간에 사는 쥐를 보고 ‘사람이 잘나고 못난 것은 스스로 어디에 처해 있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했던 진시황 시대의 승상 이사(李斯)의 인생 유전. 장량, 소하와 함께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얻는데 지대한 업적을 쌓았으면서도, 결국 ‘토사구팽’ 한마디를 남기고 죽어간 대장군 한신(韓信)의 처신이 그 좋은 실례입니다. 그들의 불행한 종말이 ‘지기, 지족, 지지’를 못한 탓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그들 개인의 행, 불행에 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꾼 것이었죠. 갑작스러운 도지사의 궐위로, 우리 강원도정이, 우리 강원도가 적잖게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도지사감’이라고 언론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들을 보면서, 보잘 것 없는 제 행복론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훌륭함이 많은 분들이기는 하지만, 그에 더하여 ‘지기, 지족, 지지’가 주는 역사의 교훈까지를 명심할 만한 인품이라면, 우리 민초들이 도지사에게 특별히 더 바랄 게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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