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시헌

강원체신청장
“그곳에 도착한 이래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가 달라 눈과 귀로 보고 들어 파악할 수는 있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기(機器)의 제조나 우편·전신 등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급선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보통신역사기행/이기열 저)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 채 160일간의 장기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온 홍영식(호 琴石)이 고종의 질문에 처음으로 답한 말이다. 고종은 이 자리에서 무려 60여가지의 질문을 쏟아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초조함과 이로 인해 가급적 개화를 빨리 해야 한다는 절박감의 표현이었다.

1883년 6월 금석은 미국과의 친선을 다지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각 부처와 의사당을 둘러보는 틈틈이 뉴욕우체국도 시찰하고 웨스턴유니온 전신회사와 미국 우정성을 둘러 보고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조선의 통신수단은 횃불과 연기를 이용한 봉수와 25∼30리마다 역참을 설치해 사람이 걷거나 말을 타고 소식을 전하는 수준이 전부였다.

그가 본 미국은 이미 1860년에 시작된 Pony Express(역마 우편제도)의 시행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물가에 대한 뉴스, 목화의 시세 등 생활에 필요한 긴급뉴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고, 최초의 전화기 특허권을 소유한 벨회사(Bell Telephone Company)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웨스턴유니온 전신회사의 통신시스템을 직접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이내 귀국한 금석은 1884년 4월 22일 개화에 목말라 있는 고종으로부터 우정총국을 건립하라는 전교를 받고 우정총국의 책임자인 총판의 지위를 받는다. 이날이 바로 오늘 정보통신의 날이다.

그는 법령을 제정하고 직원을 채용하는 등 우정총국의 설립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해 11월 18일 서울에 우정총국을, 인천에 분국을 설치하고 우편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신식 우편제도가 첫선을 보였다.

그러나 12월 4일 금석을 비롯한 개화파는 집권수구파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쿠데타를 일으키나 청나라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금석은 끝까지 고종을 옹위하다 청병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때가 그의 나이 30세.

나라를 개화하겠다는 일념으로 선진 외국문물을 들여오기 주저하지 않았던 젊은 혁명가 금석, 외세에 대한 의존과,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와 더불어 한국우정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로부터 128년이 지난 지금 그가 뿌린 씨앗이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 전국적으로 3650개의 우체국에 4만4000명의 직원과 최첨단 물류망 등 인적·물적네트워크를 가진 우체국은 매일 2000만통의 우편물 배달과 농어촌·도시 서민에게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국적인 물류망을 활용해 향토기업 제품 및 농축산품 판촉을 지원해 강원도에서만 400억의 매출을 기록함으로써 서민경제를 지원하고 있으며 OECD 국가 중 가장 저렴한 우편요금으로 13년 연속 흑자를 달성하고 국가재정을 지원하며, 공공서비스 부문 고객만족도 12년 연속 1위 달성으로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공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수익성이 낮아 민간기업이 서비스 제공을 기피하는 농어촌, 도서벽지에 택배와 금융서비스를 제공해 공공재로서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강원체신청은 지난 2월 한국우정의 씨앗이 돼준 그를 생각하고, 기념하기위해 새로 지은 신청사의 대회의실 이름을 금석실(琴石室)로 정하는 작은 행사를 했다. 오늘따라 흥분된 어조로 역참(驛站)을 폐지하고 우편제도를 만들자고 왕에게 주장하는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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