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세훈

화천 원천교회 담임목사
미국과 캐나다에는 ‘선한 사마리아인 법’(Good Samaritan laws)이라는 것이 있다. 이 법은 누군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조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면 처벌을 받는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는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돕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예수의 관점이 ‘이웃 사랑’에만 있었다면, ‘유대인’인 예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이 강도를 만난 사마리아인을 도왔다”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반대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왔다”고 말했다. 여기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가르침이 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에서 북쪽에 살던 이들이었고, 남쪽에 살던 유대인들과는 철천지 원수로 살던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마리아인은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강도를 만나 생사의 기로에 선 유대인을 도왔던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200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선한 이웃’의 표상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는 핏줄과 인종 그리고 지역을 넘어서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유대인은 남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정통적인 민족의 핏줄을 잇고 있었지만, 사마리아인은 북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앗시리아인들과의 혼혈인으로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그래서 같은 혈통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민족이었다.나아가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민족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취급되어 중동지역에서 부정적인 동물로 간주되는 개·돼지에 비유되곤 했다.

그럼에도 선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의 편견과 모욕은 뒤로 한 채, 강도를 만나 위태로운 유대인을 아낌없이 도와주었다. 그의 사랑은 핏줄도, 인종도, 지역도 모두 뛰어넘어 버렸다.

또한 사마리아인은 종교마저 넘어서고 있다. 물론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하나님’이라는 궁극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것은 같지만, 유대인들은 성전을 예루살렘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에 건축했다. 그리고는 서로 자신들의 성전에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신앙적으로, 종교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결코 양립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사마리아인은 다른 신앙, 다른 종교인이라 할 수 있는 유대인을 도왔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단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제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것보다 더 깊은 이야기, 즉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에 지역을 넘어서는 것, 인종을 넘어서는 것, 종교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잣대로 ‘지금, 여기’를 보자. 먼저, 남과 북(이념문제), 동과 서(지역문제), 상과 하(계층문제)로 나뉘어 갈등하는 오늘의 우리 사회가 떠오른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얼굴이 흰 사람들(백인종)에게는 우호적이거나 굴종적으로, 얼굴이 검은 사람들(유색인종)에게는 위압적이거나 폭력적으로 대하는 이중성도 떠오른다.

또한 각 지역에서 사찰, 성당, 교회가 지역사회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서로 먼저 겸손히 인정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도 아프게 다가온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냐는 어떤 유대교 학자의 질문에 화두로써 던진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오늘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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