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정배

춘천사회적경제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마침내 한해 1000만원에 이르는 대학 등록금에 숨죽이던 ‘88만원 세대’들이 6월 10일, ‘날라리 선배’들과 반값 등록금 약속을 지키라며 촛불을 들고 나섰다.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시급 4320원 짜리 알바에 쫓기거나 시장논리에 포위당한 상아탑에서 맹목적인 학점경쟁과 스펙관리에만 관심 있어 한다는 비판을 듣던 그들이 자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은 87년 광장의 뜨거움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증거해 주는 현상이다.

민주화 24년, 우리는 지금 파괴적인 양극화와 사회갈등에 몸살을 겪고 있다. 또한 87년 헌법적 가치가 사회지도층의 반칙과 부패로 훼손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막장사회’로 내달리고 있다는 불안에 떨고 있다. 87년 6월에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정권을 응징하기만 하면 ‘정의’가 회복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주저하지 않고 때론 감옥에 가고 때론 목숨을 버려가며 저항했다. 이제 선거가 주기적으로 있고 여·야간의 정권교체도 진행되며 지방자치제도도 시행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민주적 가치가 존중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에는 부족하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믿고 있는 사이, 시장 자유화는 민주주의가 만든 열린 공간에서 절대진리로 둔갑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수도권과 지방, 정규직과 비정규직, 재벌과 동네슈퍼 간의 격차는 좁혀지기 힘들 정도로 벌어졌다. 정부 고위직과 선출직 공직에 나선 이들이 대부분 투기, 표절, 탈세전문가인데도 ‘공정사회’를 정치구호로 외치는 것을 보면 함께 국가 공동체를 꾸리겠다는 이 계약을 지켜야 하는지 회의가 든다. 87년 6월 항쟁에서 핵심요구는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의 주인은 우리라는 선언이었다. 국민 스스로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해 가겠다는 천명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이며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시민사회의 핵심 가치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민주적 가치가 후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때에 ‘강한 시민사회’에 대한 요구는 더욱 절실하다. 왜냐하면 사회발전과 개인의 존립을 위해 우리가 계약한 국가 공동체가 때론 권력적 속성을 드러내며 위협하더라도 시민들의 사회가 튼튼하다면 순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논리가 우리 삶을 조각조각 내려 하더라도 시민사회의 ‘호혜의 경제’가 지켜준다면 과격한 시장논리는 변화 할 수밖에 없다. ‘강한 시민사회’를 위해 우리는 공적인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데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협동하는 다양한 활동에 함께 해야 한다. 정치가 우리를 실망시키더라도 정치가 우리와 멀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귀찮게 해야 하며 정치참여를 피해서는 안 된다. 또 필요하다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민주 공화국의 시민임을 당당히 외쳐야 한다. ‘88만원 세대’들에게 침묵과 도피를 주문한 것은 기성세대인 우리들이었다. 부끄럽지만 민주화를 이룬 세대라는 자부심의 이면에서 높다란 사다리를 세워놓고 그곳을 올라가기만 하면 유토피아가 열릴 것이라고 주입한 이들이 과연 누구였던가. 이제 그들이 스스로 그 사다리를 걷어차고 새로운 6월 광장으로 달려오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목소리가 전국을 울린 87년 6월과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지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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