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행 스님

월정사 부주지·새평창포럼 대표
오대산의 여름은 시원하다. 이 시원함에 감사드리며 방산굴에서 1970년도 탄허 큰스님의 예지의 21세기 화엄사상을 생각해 보고, 대방광불화엄경 역경 교정출판시를 회상해 본다. 기술과 물질이 세분화되고 발달 할수록 사회 통합은 어렵다고 하셨다. 가정이나 조직의 단체나 국가 기관도 사회 통합이 이루어질 때 발전한다고 하셨다.

삼국시대의 원효대사의 화쟁 사상을 예로 들면서 ‘통합의 리더십’을 우리 역사 속에서 찾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원효대사(617~686)라고 하셨다. 그는 삼국시대 불교 이론을 정립한 종교인이자 한국 사상사에 큰 획을 그은 철학자다. 특히 ‘소통 혹은 통합 철학’의 원류로 손꼽힌다. 그의 철학은 ‘화쟁 사상’이라 불린다. 원효는 <십문화쟁론>이란 저서를 남겼다. 고려시대에 화쟁국사로 추존됐다. 그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통일되는 시대를 살았다. 삼국이 통일된 직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회 구성원의 융합과 통합이었다. 원효의 화쟁은 상반된 두 세계를 묘합하는 원리다. 화쟁의 논리를 그는 ‘융이이불’이라고 불렀다. 상반돼 보이는 두 가지를 융합하되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다양성의 조화였다. 화쟁은 양자택일이나 변증법적 통일 논리와 다르다. 원효대사는 화쟁 철학을 구현하는 삶을 살았다. 원효는 이렇게 말했다. “옷을 기울 때는 짧은 바늘이 필요하고, 긴 창이 있어도 그것은 소용없다. 비를 피할 때는 작은 우산이 필요하고 온 하늘을 덮는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 그러므로 작다고 가벼이 볼 것이 아니다. 그 근성을 따라서는 크고 작은 것이 다 보배다”라고 하였다.

후삼국 시대 왕건의 사회통합정책을 연 인물은 견훤과 궁예와 왕건(877~943)이었다. 왕건이 가장 늦게 출발하였으나, 최종 승리는 왕건에게 돌아갔다. 왕건이 활약한 9세기 말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군웅이 할거하던 지방분권적인 특징을 지닌다. 왕건은 우선 왕위에 오르자 낮은 자세의 외교를 통해 지방의 여러 호족들에게 사절을 보내어 귀중한 선물을 주고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이른바 ‘중폐비사’정책을 취했다. 낮은 자세의 외교를 통해 지방 호족들과 화친을 맺으려고 노력했다. 이를 흔히 ‘호족연합 정책’이라 부른다. 호족연합정책과 함께 중요한 것은 농민에 대한 시책이었다.태조로 즉위한 바로 다음날 조세를 내려서 생산량의 10분의 1만 세금을 걷는 소위 ‘십일조’가 그것이다. 또 농민의 3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려 유랑하는 백성이 농촌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세종의 ‘문화 리더십’의 사회통합이다. 1418년 22세의 나이로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 세종의 통치 시기는 문화적 황금기였다. 세종은 공론화 과정을 중시했다. 소통과 의견 수렴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시사·경연·윤대 등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시사’는 왕이 정부의 핵심 부서로부터 보고를 받고 결재하는 일이다. 시사를 통해 승지 등 측근과 협의하고 세세한 내용까지 직접 지시할 수 있었다. ‘경연’에서는 신하들과 정책 결정에 적용할 원리와 선례를 연구했다. ‘윤대’를 통해서는 하급관리들로부터 실무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파격적 인재등용으로 천민 출신 장영실의 사례이며, 귀화인의 후손으로서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였고, 장영실도 관노였다고 전한다. 세종은 장영실의 신분은 낮지만 누구보다도 재주가 민첩한 것을 파악하고, 중국에 가서 과학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했다. 자격루를 비롯해 대소간의, 혼천의 같은 천문관측 기구를 만들어 냈다. 신분이 가장 낮은 여자 종들이 출산 전후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세종 8년(1426) 관비에게 출산 후 100일의 휴가를 주도록 했고, 세종 12년(1430)에는 관비에게 출산 전 한달의 휴가를 주도록 명했다.

이 시대 21세기 페이스북 트위터 미디어 SNS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사회통합과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폭염 속 하지 계절의 월정사 심검당의 새벽은 사미승의 도량석과 종성의 목탁소리만이 새벽을 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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