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순진

성공회 신부·춘천지역자활센터 센터장
내가 강원도를 좋아하는 이유는 가난의 설움이 곳곳에 묻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나름대로 예쁘게 살아가려는 사람 냄새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으로 겪는 어려움도 알고 서울의 달동네에서 생활하며 세례와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잘 가꾸어진 정원보다 아무렇게나 너부러진 수풀이 더 좋다. 사람도 경력이 좋은 사람보다 그늘진 사람이 더 좋다. 예수께서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지 않았는가, 마지막까지 그분 곁을 따랐던 사람들도 가난한 제자들이었다.

나는 종교적이라는 것에는 항상 ‘가난’이 곁에 동행한다고 믿는다. 가난하지 않은 종교는 예수께서 비난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위선이라 생각한다. 물질적인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삶이라면 어떨까.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면 참으로 멋있지 않을까 싶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문자대로 무소유라고 하면 아무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께서 말씀하신 무소유의 의미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취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 오히려 쉽다. 다만 자신에게 필요한 정도가 개인마다 다를 뿐임을 이해한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난’이나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신 ‘무소유’는 우리 일상생활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르침이지 않겠는가.

나는 ‘가난’에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사회적인 의미에서 극복해야 할 가난 곧 ‘빈곤(貧困)’이 있으며, 종교적인 의미에서 추구해야 할 가난 곧 ‘비움(空)’이 있다. 노숙인과 탁발승은 경제적으로 보면 빈곤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노숙인이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반해 탁발승은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이 두 사람의 공통 분모는 ‘가난’이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만약 지금 여기에 부유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기가 쉬울까? 누가 새로운 변화에 민감하며 대안을 꿈꿀까? 여기서 내가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가진 게 없으니 마음으로 쉽게 통한다. 빈곤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변화를 꿈꾼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

어느 날, 경제적인 편리와 가족들과의 유대 사이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 고민하는 평범한 엄마가 찾아왔다.

“신부님, 돈을 많이 벌자면 마트에서 일하면 되는데 남편과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적어 걱정이에요. 수입이 조금 적어도 가족들과 보낼 시간이 있고 생활할 정도만 되면 다른 일을 선택하고 싶어요”

결국 그 엄마는 다른 일을 선택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탐하지 않는 소박한 엄마의 일이 내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선택이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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