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신재

한림대 명예교수
세종은 학자이고, 음악가이고, 시인이고, 정치가이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종은 무사의 면모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세종의 무사적인 면모는 그가 강원도에 와서 강무(講武)를 할 때에 드러난다. 강무는 글자 그대로 무술(武)을 익히는(講) 행사이다. 그것은 곧 사냥이다.

5000여 명 내지 1만여 명의 몰이꾼들이 산에서 짐승들을 몰아 내려온다. 벌판에서 노루·사슴·멧돼지·곰·표범·호랑이 등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임금이 말을 타고 달려나가 활로 짐승을 쏜다. 사냥개가 벌판을 달린다. 이어서 수천 명의 군사들이 임금의 지휘를 받아 사냥을 한다. 변계량이 세종에게 지어 바친 ‘화산별곡(1425)’은 만기(萬騎)가 벌판을 우레같이 달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나서, 짐승을 잡아도 씨는 남겨두고 사냥을 즐겨도 한도를 둔다고 노래한다. 한 차례 강무에서 잡은 짐승은 100여 마리라고 한다.

강무는 단순한 사냥놀이가 아니다. 강무는 군사를 훈련시키는 방법이고, 종묘에 천신할 짐승을 마련하는 방법이고, 농사를 해치는 짐승들을 없애는 방법이고, 국왕과 지방 수령들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행사이다.

강무하는 기간은 대체로 9일 내외인데 두세 고을을 왕래하면서 하며 그 기간에는 벌판이나 시냇가에서 야영을 한다. 세종이 강무를 한 곳은 철원·평강·회양·횡성·진부 등인데 이들 중에서 제일 많이 찾은 곳이 철원이다. 철원은 땅이 평탄하여 달리고 쫓기에 편리한 곳이다. 철원의 가을마고개·가마벌·고석정 들·반포 등은 세종이 강무를 한 곳이고, 대야잔·화창리·마장곶·정포·습매포 등은 세종이 야영을 한 곳이다.

강무에서 세종은 왕으로서의 위엄을 벗어버리고 소탈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강무 기간 중에 세종은 술자리를 자주 베푼다. 조선왕조실록에 ‘낮참에 술상을 차리고’ ‘친히 술잔을 내리고’ ‘술을 취하도록 주고’ ‘미천한 사람에게까지 몫이 돌아갔다’ ‘술과 음식을…천한 자들에게까지 나누어주었다’ 등의 기사가 자주 보인다. 궁궐에서 벗어나고 여러 가지 제약에서도 벗어나서, 자연 속에서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상황을 세종은 좋아한 듯하다. 1435년 2월 19일의 기사에는 ‘철원 들에서 사냥하매 촌마을의 부녀자들이 모여 와 구경하니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내려주고…’라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시골에 가서 현지조사를 하는 민속학자나 문화인류학자와 같이 세종은 시골 부녀자들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다음 날에 세종은 강원도 감사와 도사에게 각기 옷 한 벌씩을 주고, 비를 맞고 추위에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술을 보낸다. 이에 앞서 1434년 봄에는 사냥용 매가 날아 도망하여 세종이 사람을 보내어 찾으려던 차에 철원의 한 농부가 이를 잡아 바치니 그에게 옷과 쌀·콩을 각각 두 가마씩 주기도 하고, 1439년 봄의 철원 강무에서는 한 갑사가 칼을 들고 표범과 육박전을 벌이다가 표범에 물리자 세종이 나서서 의원과 함께 그를 구해내기도 한다.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강무에 가장 열성을 보인 왕은 세종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1419년(세종 1년)부터 1442년(세종 24년)까지 21회의 강무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태종의 6회, 성종의 1회와 비교가 된다. 세종의 21회의 강무는 모두 강원도에서 실시하였고, 그 중 19회를 철원에서 실시하였다.

세종의 강무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행군·진법(陣法)·활쏘기·칼쓰기·단결력 등을 익히는 군사훈련이면서 일상에서 벗어난 놀이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만여 명이 참여하는 장엄한 행사이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따뜻한 정을 나누는 행사이기도 하다. 1449년 3월 6일에 세종은 신하들에게 강무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듬해에 세종은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좋은 문화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장시켜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강무도 그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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