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 완

법흥사 주지 스님
웃는 사람 주위에는 사람이 모이게 되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 잔치가 벌어진다. 부처님이 48년간 전법하시면서 베풀어 놓으신 모든 가르침을 일대시교(一代時敎)라 한다. 이 일대시교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중국 당나라 말기의 대선사 운문화상은 때와 장소에 따라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한 것이므로 다 좋다고 답한다.

대기설법은 설법을 듣는 사람의 형편과 수준, 그리고 상황에 맞게 가르침을 설하신 것을 말한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말이 응병여약(應炳輿藥)이다. 어느 병에 걸렸느냐 알아서 약을 처방한다는 뜻이다. 즉 부처님은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듯 중생이 무엇을 고민하고 아파하는지 거기에 맞게 적합한 비유와 예로 설법하셨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중생들은 한결같이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웃음을 되찾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러므로 웃음이다.

불교에 화안애어(和顔愛語)라는 말이 있다. 미소를 머금은 환한 얼굴과 사랑이 담긴 말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를 최고의 자비 또는 보시라고도 말한다. 화안애어는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도 얼마든지 다른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선물이다. 그래서 최상의 보시를 화안애어로 내세우는 것이다. 환한 얼굴과 친절한 말로 다가서는 사람은 어느 장소에서건 누구에게나 배척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도 웃음에 인색한 것이 우리 사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스탠포드 의과대학교 윌리엄 프라이 박사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6세 정도의 유치원생들은 하루 평균 300번 정도 웃는다고 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그 20분의 1인 15번 정도로 웃음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이런 저런 걱정과 스트레스로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줄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숨어 있다. 바로 웃음에 대한 부정적 학습의 영향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적 관습이 남아 있어 실없이 웃는 것에 대해 면박을 주기 일쑤다.

그래서 “헤프게 웃지마”,“시시덕거리지 마!”,“쓸데없이 웃고 그럴래?” 등 웃음에 제약을 가한다. 이런 교육을 은연중 받아 온 우리나라 성인들의 웃음은 서양의 성인보다 그래서 더욱 인색하다.

웃음은 행복의 징표다. 웃음은 화합의 기호다. 나아가 웃음은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상징이다. 웃음을 잃게 되면 내가 먼저 고통스럽다. 웃음이 제약받는 사회는 억압과 굴레의 취약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느 사회든 만면에 웃음이 활기칠 때 그 사회의 행복 척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생활을 유지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누구를 대하든 웃음으로 맞이하라. 당신의 그 웃음은 헤픈 것이 아닐 뿐더러 실없고 가벼운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처님의 미소를 전하는 보살로 이웃들에게 다가서게 됨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옛 조사들은 열반의 순간에도 편안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한 가닥 웃음이 수행자의 평생 행복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 웃음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웃음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행복 바이러스’라면 우리의 웃음 또한 이웃과 사회를 맑게 해주는 자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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