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신재 한림대 명예교수
삼척은 고려의 역사가 끝난 곳이고 동시에 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이 하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무덤도 삼척에 있고, 조선의 첫 임금 태조의 5대조의 무덤인 준경묘도 삼척에 있어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공양왕의 무덤은 삼척에도 있고, 경기도 고양에도 있다. 이것이 어찌 된 사정인지는 밝혀진 바 없다. 공양왕의 무덤이 둘인 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유발시킨다. 이것은 팩션(faction)의 좋은 소재이다.

준경묘에는 음택풍수전설이 있다. 목조가 아버지의 묘를 잘 썼기 때문에 그의 4대손인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설에서 우리는 천명사상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한편의 전설만으로는 준경묘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어렵다. 이 전설을 대폭 확장하여 고난 극복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은 활용도가 높은 문화자원이 될 듯하다.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4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생애는 장엄한 서사시의 좋은 소재이다. ‘용비어천가’가 있지만 이것은 장엄성과 긴박성이 부족하다.

전주의 토호 이안사(목조)는 전주 지주(知州)와 산성별감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주를 탈출해 삼척의 노동(지금의 미로면 활기리)으로 온다. 이때 전주의 토착민 170여 호가 목조를 따른다. 삼척에서 목조는 부모를 잃는다. 전주의 산성별감이 관동지방의 안렴사(지금의 도지사)로 부임해오자 목조 일행은 배를 타고 북상하여 함경도 덕원(의주)의 용주리로 탈출한다. 이곳에서 익조가 태어난다. 목조와 익조는 경흥의 알동(斡東), 함흥 등으로 옮겨다니며 숱한 파란곡절을 겪는다. 다행하게도 홍양호의 ‘흥왕조승(興王肇乘)’이 남아 있어 우리는 이 책에서 많은 자료들을 얻을 수 있다. 홍양호는 경흥부사를 지내던 시절(1777~1779)에 4조의 유적지들을 직접 답사하면서 전설들을 채록해 놓았는데 이때 채록한 자료들이 ‘흥왕조승’의 마지막 권에 실려 있다.

목조와 익조의 행적은 구약의 출애굽기(엑소더스)와 유사한 데가 있어 흥미롭다. 목조가 지주와 산성별감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토착민 170여 호와 함께 전주를 탈출하는 장면은 모세가 파라오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유대인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는 장면과 대응한다. 노파가 익조에게 살길을 암시하는 장면은 신이 모세에게 살길을 계시하는 장면과 대응한다. 익조가 여진의 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적도(赤島)로 가려고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바다가 갈라지는 장면은 모세 일행이 이집트 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홍해(紅海) 앞에 이르렀을 때 바다가 갈라지는 장면과 대응한다. 목조 및 익조 일행이 만주 벌판에서 고생하는 장면은 모세 일행이 사막에서 고생하는 장면과 대응한다. 목조 이야기와 모세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한 집단이 압박을 받는 현실에서 탈출하여 자유가 있는 이상향을 찾아가는 주제가 일치한다. 이것은 인류의 공통된 소망이고, 세계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 주몽신화, 제석본풀이 등에도 기적으로 물을 건너 새 세상으로 가는 장면이 있다.

다만 모세 이야기에서는 투쟁정신이 부각되는 데에 반해서 목조 이야기에서는 덕이 부각되는 것이 다르다. 목조(穆祖)라는 시호 자체가 그가 덕을 베풀고 의를 행한 것을 기리는 뜻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국문학의 정체성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한국의 장엄한 대탈출기는 서양의 엑소더스와 차별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조(1752-1800)는 함경도 지역을 개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홍양호(1724-1802)가 ‘흥왕조승’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1799년 12월 21일). 이 책을 읽고 정조는 감격하여 ‘비답(批答)’을 쓴다. 그러나 정조는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흥왕조승’을 헌정 받은 지 6개월 후에 세상을 떠난다(1800년 6월 28일). 고종(1852~1919)은 조선왕조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대한준경묘를 수축했다(1899년). 그러나 고종은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에 퇴위된다.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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