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기선

춘천교구 양구본당 신부

1771년 프랑스의 수도원장 디누아(Abate Dinouart)는 <존재의 예술(L‘arte de se taire)>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침묵의 기술(l’arte di tacere)’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침묵하는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가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절하게 입을 다무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는 계속해서 현명한 자들의 등급을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명한 자의 첫 등급은 침묵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화중에 절제를 몸으로 익히고 적게 말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세 번째는 과하게 그리고 나쁘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침묵이 겨울날 두꺼운 외투 속에 몸을 감추듯 비겁함이나 기만을 내포할 수 있다면 차라리 말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말해야 될 때가 있는 것처럼 침묵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침묵이 말하는 것보다 우선입니다. 침묵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올바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누아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꼭 말해야 될 때 침묵하는 것은 소심함과 현명치 못함을 드러내는 표지이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은 경솔함과 무분별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훨씬 덜 위험하다. 인간은 침묵할 때에만 비로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주인으로 의식하기 때문이다.”

240년 전의 프랑스의 한 수도원장의 말씀이 오늘도 공명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후회하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주고받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고소고발하며 원수가 되고 있는지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 현장에서 날마다 친구와 동료가 또 다른 증오의 대상으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침묵해야 할 때 말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말해야 할 때 너무 많은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좋게 말할 수 있음에도 나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말하기만을 배웠지 침묵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다투어 배워야 합니다. 영어 단어나 수학공식을 배우고 익히듯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침묵의 기술’은 말을 할 줄 알면서도 입을 다무는 기술입니다. 절제와 지혜 그리고 의로움과 용기의 덕이 필요합니다. 성장하면서 저절로 익혀지는 사회 속에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의 대부분이 고함지르며 싸우는 모습입니다. 육성으로 부족하니 메가폰을 들고 말합니다. 소리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는 현수막을 내겁니다. 이 현수막은 침묵의 대표적 장소인 성당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말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머리에 띠를 두르고 온몸으로 절규합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들립니다. 한 순간도 멈춤 없이 들려오는 소음입니다. 소음은 스트레스를 발생시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불행하다고 판단하게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입을 다물어 봅시다. 침묵을 배우고 내면의 소리를 듣는 법을 익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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