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신재

한림대 명예교수

주민들이 문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 상(賞)에 권위가 없고 따라서 시상식에 감동이 없는 것, 문화 관련 기관 혹은 단체들 사이에 갈등이 심한 것, 관청과 민간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것 등이 지역 문화계에서 자주 거론되는 문제점들이다. 이러한 문제점들과 관련해서는 대사습(大私習)을 주목해볼 만하다.

대사습은 19세기 후반기 매년 동짓날 혹은 그 전후에 전주에서 열리던 판소리축제이다. 판소리의 전성기였던 19세기에 대사습은 명창의 등용문이었다. 장자백, 김세종, 송만갑, 이날치, 박만순, 주덕기 등이 대사습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 명창들이다. 그런데 이 대사습은 운영 방법이 특이하여 우리의 관심을 끈다.

대사습은 공무원이 주관하면서도 관제 행사가 아니라는 점이 특이하다. 대사습은 통인청(通引廳)에서 주최햇다. 통인은 벼슬아치가 아니라 구실아치다. 즉 하급 공무원이다. 벼슬아치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니 하급 중에서도 하급이다. 이런 통인들이 상관들의 결재도 받지 않고 감히 판소리 광대들을 통인청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연 것이다. 대사습은 관청의 공식적 행사가 아니니 예산이 없었다. 통인들은 멀리서 모셔온 광대들을 음식 솜씨 좋은 집에 민박을 시켰다. 그 집에서는 광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식대와 숙박료를 받지 않았다. 통인들은 축제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게에서 외상으로 가져왔다. 그 가게에서는 외상값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사습은 영문(營門)의 통인청과 본부(本府)의 통인청에서 각각 개최했다. 그러니까 두 통인청은 서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 대사습의 광대들이 판소리를 더 잘 불렀는지, 어느 쪽 대사습에 청중이 더 많이 몰려들었는지, 주민들은 예의 주시하였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통인들은 수백 리 길을 다니며 유능한 광대들을 찾아내었고, 그 광대들을 경쟁적으로 잘 대접하였다고 한다. 그 광대들이 판소리를 잘 불러야 자기편이 이길 것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즈음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영문은 도청이고, 본부는 시청이다. 그러니까 도청과 시청이 각각 주민들을 상대로 판소리 잔치를 벌이고 어느 쪽으로 구경꾼들이 더 많이 몰려드는지 시합을 한 것이다.

대사습에는 상이 없었다. 따라서 심사위원도 없었다. 요즘의 대사습에서는 대통령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상을 주지만 원래의 대사습에서는 상이 없었다. 대사습은 심사를 해서 명창을 뽑는 행사가 아니라 판소리를 즐기는 행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습에서 명창이 탄생했다. 구태여 심사위원을 두어 심사를 하지 않아도 명창은 가려지게 마련인 법. 명창을 가려내는 사람들은 바로 청중들이었다. 대사습이 끝나면 누가 명창이라는 것이 자연히 판가름이 났고, 그것은 입소문으로 퍼져나갔다. 대다수 청중이야말로 가장 엄격한 심사위원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명창으로 인정을 받은 광대는 여기저기에서 초대를 받았다. 궁중의 초대도 받았다. 명창은 궁중에 들어가서 여러 날 머무르면서 판소리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가 나올 때 임금은 그에게 삼 년 먹을 양식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요즈음에 경연 현장에서 대통령상을 주는 제도와 격이 다르다.

대사습은 판소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책상에 앉아서 출연 신청자의 서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수백 리 길을 다니며 광대들을 찾아내는 통인들의 열정, 영문과 본부의 치열한 경쟁, 광대들을 우대하는 민가와 외상값을 받지 않는 상인들의 판소리 사랑, 청중들의 탁월한 판소리 감식안 등이 대사습을 성공시킨 요인들이다.

판소리는 지방문화가 중앙으로 진출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로 성장한 예술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을 수 있다.) 판소리는 유네스코에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세계적 문화가 되었다.

아리랑과 판소리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무형문화유산의 쌍벽이다. 판소리의 고향이 전라도라면 아리랑의 고향은 강원도이다. 강원도는 아리랑의 발전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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