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가 기회인지, 위기가 위기인지… 위기를 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 조직의 저력을 알 수 있다. 즉 국가의 경우 국가시스템의 위력은 정치·경제적 위기상황이나 내부의 갈등이 첨예한 시점에 양분된 국론을 단일의 해법으로 응집해 낼 때에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국민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얼마나 신뢰하고 순응하느냐에 따라 국가 공동체의 미래가 좌우됨은 분명하다.

지난 2000년도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부시 대통령과 고어 전 부통령 간의 치열한 대결로 마지막까지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급기야 플로리다주 4개 카운티의 기계가 읽지 못한 4만 5천장의 수작업 집계여부가 두 후보의 운명을 결정하는 갈림길이 됐다. 연방대법원은 절차적 적법성을 중시, 고어 측에 유리한 플로리다 대법원의 수작업 검토 요구를 거부하고 부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뒤 고어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선거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마디로 ‘게임의 룰’에 승복하는 미국인의 저력을 읽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고어는 전국 국민투표에서 부시 후보보다 50만 표 이상을 앞섰으나 선거인단수에서 근소한 차로 밀려 선거에 패했던 후보로 역사에 남았다.

우리 선거제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없겠지만 만일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떤 양상이었을까? 분명 각 후보의 지지자들이 사법부를 강하게 질타함은 물론 여론이 양분되어 전국적 소요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몇몇 쟁점 법안 상정을 저지하기 위해 해머로 국회 문을 부수는 국회의원의 거친 행동이 별로 새롭지 않은 마당에, 대선의 승자가 바뀔 수 있는 사법부의 판결은 국체(國體)의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의롭지 못한 채 부귀를 누림은 뜬 구름과 같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는 논어의 한 귀절도 있는데 연일 터지는 정치권 비리의 정도가 도를 넘어섰다. 위기 극복의 중심권에 서 있어야 할 정치권이 사회집단 갈등을 치유하기는커녕 조장하는 주범이니 깊은 자성이 필요하다. 대화와 타협, 선의의 경쟁, 게임의 룰 등 정도(正道)를 논하기에는 정치권이 대체로 함량미달이다.

조미현 출판기획부국장 mihyu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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