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한호

춘천동부교회 목사

새해를 맞이하여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와 함께 CD를 정리하였습니다. 구석구석 사용하지 않던 CD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하나 듣고, 읽고 하면서 필요한 것은 보관하고 필요 없는 것은 지우면서 정리하였습니다. 지운다는 것은 때로는 아쉽기도 하지만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CD를 지우는 일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CD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지우개가 있어서 새해가 되면 노트를 정리하고 수첩을 정리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우개로 모든 것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당시 지우개의 질이 좋지 않아 마치 고무 판화의 쪼가리 같았습니다. 지우개로 글씨를 지운다기보다는 종이를 한 꺼풀 벗겨내는 정도여서, 지우다보면 공책에 구멍이 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지우개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지우개 특유의 냄새도 맡으며, 새해가 되면 얼마나 열심히 노트나 수첩을 예쁘게 정리하였는지 모릅니다.

새해를 ‘설’또는 ‘설날’이라고 부릅니다. ‘설’에 왜 사람들은 노트를 정리하며 열심히 지우개를 사용하는지 설의 기원도 다양합니다. ‘한 살 나이를 더 먹는다’라는 말에서 ‘살’이 ‘설’이 되었다는 견해와, ‘장이 선다’는 ‘선다’의 ‘선’에서 ‘설’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설다(제대로 익지 않다)’, ‘낯설다’ ‘설어둠(해가 진 뒤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어둑어둑한 때)’의 ‘설’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삼가다’,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뜻의 옛말 ‘섧다’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되새겨 보면 ‘설’의 의미는 새날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고, 몸가짐을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저마다 지우개를 들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리다보면 실수할 때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지우개가 필요합니다.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지워갑니다. 혹시나 지울 때 아무 것이나 지울까 염려하며 지웁니다. 그런데 지우개가 없다면 어떻게 그림을 그리겠습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그림을 신중하게 그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한번 그린 선을 다시 지울 수 없기에 생각하며 그릴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지난 세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시간 비행기를 타지 않았어도, 그 시간 딸의 집에 가 있지 않았어도, 자녀에게 큰 소리를 치지 않았어도, 신혼여행을 인도네시아로 안 갔어도….우리의 삶은 지우개로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기에 이생이라 하지 않고 일생이라 합니다.

이처럼 지우개가 없는 인생이야 말로 한번밖에 그릴 수 없는 일생이기에 조심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설’을 생각하며, 2012년 인생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좀 지워버리고 싶은 것, 감추고 싶은 것일랑 ‘쓱싹쓱싹’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새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지나 망각은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이 설날에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한해가 저물어 갈 때 지우개를 시용하지 않아도 ‘합격’ 점수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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