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들이 즐겨 애송하는 시 오마르 워싱턴의 ‘나는 배웠다’에는 ‘인생에서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보다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라는 귀절이 나온다. 구태여 이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리더십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일하는 방식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리더십에서 감성과 소통, 그리고 관계가 강조되는 이유도 바로 ‘리더십=함께 일하는 방식’ 여기에 근거한다. ‘백성들이 믿어주지 않으면 나라가 흥기되고 향상될 수 없다’는 공자의 말도 결국은 진정한 함께가 만들어내는 역동적 파워 그것이 리더십임을 강조한다.

‘함께 일하는 방식’으로의 리더십 정의가 타당하려면 리더가 진정으로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을 누구로 그리고 어디까지로 규정해야 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리더의 ‘함께’는 보편적 구성원 전체를 일컬어야 마땅하니 선출직의 경우 표를 행사한 유권자 전부가 ‘함께’에 해당된다. 이론상으로 이 커다란 범주의 ‘함께’에 이의를 제기하는 리더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론과 꼭 맞지 않는 현실을 우리는 왕왕 목격한다. 예를 들어 일부 선출직 리더의 경우 자신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사조직이나 단체를 편파적으로 선호하며 이들을 ‘함께’의 영 순위로 설정해 분란을 조장한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을 비롯한 일부 진보교육감들의 제 식구 봐주기의 무리한 인사가 바로 이 잘못된 함께의 전형이다.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든 선택과 결정이 필요할 때는 갈등이 존재하지만, 원칙이 지켜지면 그 갈등은 어떻게든 봉합된다. 그러나 원칙이 흔들리면 공동체가 견뎌낼 수 있는 임계수준을 넘어서고 리더십은 겉잡을 수 없이 추락한다. 인사문제는 선택된 사람이 있으면 배제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 반드시 상식이 통용되는 공정성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 베이컨의 ‘동굴의 우상’이란 이론이 있다.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선입견 가운데,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사물에 대한 바른 생각과 판단을 그르치는 편견을 말한다. 혹여 곽 교육감을 비롯한 일부 진보교육감들이 자신들만의 동굴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편협한 ‘함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좋은 리더가 아니다.

조미현 출판기획부국장 mihyu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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