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진

수필가

나는 참 바보다. 요즘 세상에 자동차운전을 못한다. 항상 애꿎은 두 다리에 의존한다. 30분 안팎의 모임엔 늘 땅바닥을 밟고 다닌다. 차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다. 지나가는 차량물결속의 아는 이들이 연민의 눈결로 바라봐도 모른다. 오로지 앞을 똑바로 쳐다 보며 걸을 따름이다. 하늘에 새털구름이 떴는지, 푹신한 솜틀구름이 내려다 보고 있는지 멍청하게 볼 따름이다.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서? 아니다. 다리에 힘 좀 올리기 위해서다. 솔직히 택시비가 아깝기도 하다. 운전 연습 때, 구불구불한 널미재를 80㎞/h로 달렸더니 운전대를 빼앗은 곁지기의 각오도 한 몫 하리라. 자동차운전면허증은 ‘1종보통’이다. 집사람 지갑에서 15년간 긴 잠을 자고 있다. 이젠 그 얼굴도 잊어먹었다.

나는 아직 밥을 하지 못한다. 그 죄는 나한테 있는 게 아니다. 4박5일의 동남아여행을 가더라도 밥을 냉장고 가득 들여 놓고 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귀밑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흰 머리칼들을 볼 때마다 이젠 배워놔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다. 4계절 옷 중 여름옷과 겨울옷은 대충 알지만 그 밖의 것은 잘 모른다. 외출할 때마다 차려입고 거실에 나가 심사를 받는다. 무사통과할 때는 가물에 콩 나듯이다. 잘 가르쳐 줄 때도 있지만, 짜증이 나는지 알아서 갈아입어라 할 때는 막막할 때가 많다. 핀잔을 듣더라도 재심사를 당부하며 가르침을 구걸한다.

신발도 마찬가지, 신발에 넣을 깔창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아직도 모를 일은 왜 좋은 옷은 집에서는 입으면 안 될까? 입어서 달으나 옷장에 고이 모셔놓고 세월 가 망가지나…. 집에서 운동복 대신 외출복을 입고 버틸 때가 늘어나고 있다. 입이 써서 말을 않겠지. 훈계를 하면 이러리라. “연구 씨 눈에 잘 보이려고….”

(연구: 집사람 이름-장인께서 작명할 때 돌림자를 넣어 대우를 해 준 이름?)

나는 집사람 생일을 제대로 못 챙긴다. 아들, 며느리, 손녀, 조카, 조카며느리, 사촌동생들, 제수씨들, 친구와 친구부인들 생일은 기억했다가 전화로라도 축하한다. 헌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생일은 깜빡 잊어먹고 어물쩍 넘겨 올 때가 많았다. 직장에 다닐 때는 간이 매우 컸던 모양이다. 지금은 어림도 없다. 독을 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석 달 전 생일날은 춘주수필의 ‘수필가족걷기 모임’에 갈까 해서 첫 번째 결재를 올렸더니, 기가 찬지 아니면 아이들이 있어서 그런지 웃으며 퇴짜를 놓았다. 다들 돌아가고 단둘이 있을 때, 두 번째 결재를 올렸다가 시베리아의 차디찬 바람이 휘몰아쳐서 한 사흘 냉기류의 맛을 톡톡히 봤다.

나는 노래를 부를 줄 모른다. 아니 돼지 멱따는 소리밖에 지를 줄 모른다. 모임의 수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지경인데 1차에 배를 채우고 나면 꼭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부터 비상이다. 어떤 핑계로 빠져나갈까 궁리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노래방 도우미를 자처한다. “무슨 노래?”싹싹하게 이사람 저사람한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인다. 동행자들의 노래곡목을 노래방기기 상단에 두 줄 가득 올려놓는다. 줄어들면 올리고, 또 올리고. 그 놈 한 시간이 왜 그리도 긴지. 내 수첩엔 노래방을 즐기는 회원들 애창곡을 적은 것이 빽빽하다. 내 이름 밑엔 흘러간 노래 ‘242 노들강변’과 ‘3695 부산행진곡’, 딱 두 곡이 외롭다고 계면쩍어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참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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