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고려보(高麗堡)라는 마을을 자주 지나게 되는데 바로 고국에 못 돌아간 환향녀나 피로인(被虜人)들이 어울려 살던 마을들이다. 조선시대의 사신들 기록인 '연행록'에 보면 이 고려보 사람들의 눈물겨운 대목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실향민들의 타향살이를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고향의 참뜻이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절대로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기야 현대인들은 어느 의미에서 모두가 다 실향민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고향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실체는 없는 것이라고. 태어나서 자란 곳이라는 의미의 고향은 있지만 고향 이미지는 이제 퇴색할 대로 퇴색해 버렸다고. 동구 밖 느티나무는 이미 베어져 흔적마저 없고, 당산 신목이었던 낙락장송은 썩어내려 아무도 더 이상 그곳에서 기원하지 않게 돼 버렸다. 고향은 고향이되 그립고 눈물나는 고향 이미지는 기억의 편린으로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런 면에서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이 불후의 명시 '실락원'에서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동산서 추방당하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 읊은 것은 기막힌 선견이고 탁견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즐겨 "하이마트로" 즉, "잃어버린 고향"이라 한 것 역시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 수 없다는 현대인들의 근원상실감을 의미해 공감을 준다.

실향민들은 고향에서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어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은 서해안 쪽에, 함경도와 강원도 북쪽 출신은 동해안 쪽에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 속초의 '아바이 마을'은 함경도 사람들이 실향의 애환을 남긴 '실향문화'의 보고란 인식이 일반적이다. 속초시가 이 마을 사람들을 집단 이주시키려 한다니, 또 하나의 상징적인 문화마을이 사라질 판이다. 우리는 언제쯤 문화인이 될 것인가.

李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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