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홉의 가장 완숙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있는 4막 희곡 '벚꽃동산' 은 1903년에 썼지만 이듬해 1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초연 후 출간됐다. 이런 내용이다. 남러시아에 '벚꽃동산'이란 경치 좋은 곳이 있었다. 이미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지주 라네프스카야 부인은 한 때 자신의 농노의 자식이었으나 신흥상인이 된 로파힌에게 이 동산을 경매로 넘겨준다. 부인 일가는 로파힌의 손에 묵은 벚나무들이 찍혀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땅을 떠난다. 이 희곡에서 벚꽃은 '추억'이다.

일본열도가 태평양에 가랑잎처럼 떠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왜 벚꽃을 국화로 삼았는지 짐작이 갈 만 하다. 언제 열도가 침몰할 지, 언제 지진으로 초토화될 지, 먼 미래가 없는 그들에게 일시에 피고 지는 그 꽃은 일본 국민성과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지금 눈앞의 생존이 더 급한 그들에게 그 꽃은 오로지 '단결'인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 벚꽃은 그 꽃을 국화로 정한 나라에 대한 '증오'일까. 갤럽조사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꽃나무 서열에 벚꽃을 진달래, 개나리, 동백 다음으로 4번째라고 밝혔다. 그 꽃은 우리의 가슴 한 구석에 새겨진 '증오'를 지울 수 없나보다. 그러나 벚꽃은 신기루처럼 피고 지는 그 생리 만으론 영락없는 '냄비'다.

그 벚꽃 생리 같이 파르르 끓다 금새 식어버린 모습을 정부가 보였다. '일 교과서 왜곡'과 관련해 주일대사를 한·일 관계 사상 3번째라는 기록적인 소환, 팔팔 뛰는 모습을 보여놓고 침묵일관하고 있다. 혹시 어린이들까지 나선 '규탄'을 "데모부터 배우게 할 순 없다"며 말릴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한국의 4월은 벚꽃축제의 달이다. 일본에선 한국인에게 벚꽃은 '냄비'라고 말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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