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임금이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것은 1789년 겨울이었다. 수원에 묘를 옮기고 묘호를 영우원(永祐園)에서 현륭(顯隆)이라 고치면서 수원 백성들에게 유시를 내렸다. "화산부(수원)는 곧 나의 선영이 되었으니 나는 그대들을 한 가족으로 보겠노라.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고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나의 책무라고 생각하노라." 정조는 새 묘소 주변에 사는 백성들에게 10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능행(陵行)이 통과하는 지역에는 1년치 세금을 감면하는 파격적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하지만 한 해 한 번씩 현륭을 참배하자면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왕이 강을 건너 거둥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왕이 타는 배가 용주(龍舟)라 왕이 강을 건너는 법도를 용주법이라 했는데 절차와 방법이 복잡하고 불편해서 정조는 이듬해(1790) 이른바 주교지남(舟橋指南;배다리를 놓아 운용하는 지침)을 하교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주교지남이 정조의 아이디어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강에 배다리는 그렇게 해서 놓여지게 되었고 이 배다리를 관리 운영하는 관청으로 주교사(舟橋司)가 설치되었다.

한강 배다리는 임금을 위한 다리였다. 용산에서 노량나루까지 800여척의 배를 늘어놓고 그 위에 송판을 얹어 상판을 만드는 식의 임시 다리였지만 이 다리 공사가 시작되고 사용후 철거되기까지 민폐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강의 배를 거의 다 징발하니 일시에 한강 수운이 정지되고 뱃삯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나룻배 사공들로 부터 삼개(麻浦) 용산 송파 광나루 객주들과 그 객주를 중심으로 들꽃처럼 번진 색주가들까지 불경기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춘천 '물 심포니'에 배다리가 등장했다. 노량진 배다리를 공짓내로 옮겨 복원한 것이지만 공지천 일대를 관광명소로 만들면서 포장집촌 경기를 부양할테니 무상한 세월 속의 무상한 풍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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