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에 불과 18 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홍영식(洪英植)이란 청년 관리가 있었다. 이 신예 청년은 당시 내로라 하던 인물인 김옥균 박영효 등과 어울려 지내게 되고,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개화사상을 갖게 된다.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더욱 신문물을 도입해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 홍영식은 외교사절단의 부사로 미국에 가서 우편제도에 큰 감동을 받는다.

귀국 후 고종에게 우편제도의 도입을 건의하자 고종은 당시 나이 30 세이던 홍영식을 우정총국의 초대 총판에 임명한다. 오늘의 서울 견지동에 우정총국을 짓고 홍영식은 각종 규정을 제정하면서 업무를 시작하다가 우표 제작의 난제에 부닥치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에 우표를 인쇄할 만한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과 홍영식이 고심, 합작하여 일단 태극 문양의 우표 도안을 마치고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우표를 찍어 들여오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등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는 1884년 11월 18일부터 사용된 오문(五文) 십문(十文) 이십오문(二十五文) 오십문(五十文) 백문(百文) 다섯 종류의 문(文) 단위 우표였다. 문이란 당시 화폐인 엽전의 단위로 곧 푼이었다. '대조선국우초'라고 표시된 이 우표는 280만 장이 인쇄됐으나 일단 2만 장이 도착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일어나 우정국은 출범 20일만에 폐쇄되고 홍영식은 청나라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갑신정변 다음에 도착한 278만 장의 우표는 어디로 갔나? 폐기 처분됐나? 뒷날 "서울 중앙우체국 개국 낙성식 때 이승만 대통령이 '민가의 도배용지로 사용된 우표를 외국 상인이 거액을 주고 사갔다'는 말을 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질 따름이다. 강원도에서 작년 한 해에 주인 없는 우편물이 2만6천 통이나 폐기되었다 한다. 놀라운 일이다. 마치 전설 같다.

李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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