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나무도 사춘기를 겪는다. 과일나무를 심은 지 6년쯤 지나면 청소년들이 이유없이 짜증을 내고 반항하는 것처럼 과일나무도 갑자기 가지를 퍼뜨리고 결실이 불량해지는 등 통제불능 상태가 된다. 또 과일나무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 물이 부족할 경우 잎과 과일 간 치열한 '물싸움'을 벌이는데 대체로 과일이 지는 편이다. 과일이 충분히 크지 못하고 당도가 떨어지며 착색이 불량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겨울의 혹한과 올봄의 '왕가뭄'으로 과일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아 열매가 제대로 영글지 못할까 걱정했으나 이 가을 시장에 과일이 풍성하다. 이뇨 효과가 탁월하고 신장병에 좋다는 수박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마귀를 ?는 힘을 지녔다는 복숭아가 찾아와 홍황색 얼굴을 붉힌다. 레스테라트롤이라는 항암 성분이 들어 있다는 포도는 또 얼마나 지천인가. 시련이 가져다 준 그 맛에 이르러 인간은 과일에게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다른 과일은 사랑받는데 요즘에 웬지 밤은 홀대받는 것 같다. 요상한 모양으로 홀리고 이상한 맛으로 교태부리는 외국산 과일들이 쏟아져 들어오니 황갈색 각피에 싸인 밤 따위는 뭔가 좀 촌스럽게 보이기 때문인가? 그러나 추석 차례상에 반드시 올려야 하는 과실이 밤이라 이런 생각을 조상들이 좋아할 리 없다.

'사물기원'이란 책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한나라 무제가 결혼하던 날에 꽃과 과일을 던졌다. 꽃과 과일의 수만큼 자녀를 얻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를 보면 폐백 때 대추와 함께 밤을 던지며 덕담하는 우리의 오랜 전통이 한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이다. 이 때 던져진 과일이 굳이 대추와 밤인 것은 대추와 밤을 뜻하는 '조율자(棗栗子)'란 말의 중국 발음이 '조립자(早立子;빨리 아들을 봄)'나 '조리자(早利子;빨리 부자가 됨)'와 같아서라고 하던가? 양구 남면 원리마을에서 밤 줍기 행사가 열렸다. 밤, 득남 혹은 부자라. 그래, 올 가을엔 밤을 주워 볼까?

李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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