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효(春曉)라 말하기 좀 뭣하다. 진달래도 일주일 이상 빨리 피는 이상 고온 현상 때문에 몸으로 느끼는 세월은 이미 4월 하고도 중·하순에 이르렀다 하지 않던가. "봄잠에 취해 새벽 온 줄 몰랐는데(春眠不覺曉)/ 곳곳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 들리네(處處聞啼鳥)"라는 맹호연(孟浩然)의 '춘효'를 음미해 보기도 전에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을 읊어야 제격일 정도로 계절이 저만큼 앞서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엄연히 김지하의 노래처럼 "삼월/ 온몸에 새순 돋고/ 꽃샘바람 부는/ 긴 우주에 앉아/ 진종일 편안하다"는 3월이다. 그래서 고두현의 '남으로 띄우는 편지'는 유효하다. "봄볕 푸르거니/ 겨우내 엎드렸던 볏짚/ 풀어 놓고 언 잠자던 지붕 밑/ 손 따습게 들춰 보아라/ 거기 꽃 소식 벌써 듣는데/ 아직 설레는 가슴 남았거든/ 이 바람 끝으로/ 옷섶 한 켠 열어 두는 것/ 잊지 않으마./ 내 살아 잃어 버린 것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빛나는 너."

아, 주문진에서 고진하 시인이 벌써 '라일락'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香囊)을/ 움켜쥐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그러나 아직 라일락이 피지 않았으므로 이수익의 '해동(解冬)'이 제격인가?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너/ 어둡고 긴 겨울의 늪을 지나며/ 학대받은 억새풀 모진/ 그 가슴으로도/ 찬란한 봄을 맞으리란 것을/ 믿으며, 기다리며, 지내왔구나."

기왕에 봄 시를 감상할 바엔 김지헌의 '복수초'는 어떨까. "백색의 게릴라가 온 산을 점령하고/ 툰트라의 바람은 아직 경보를 풀지 않았는데/ 지층 깊은 곳의 뜨거운 마그마/ 그 열정을 삭여…/ 선문답하듯/ 어느새 대지를 찢고 올라오는/ 샛노란 꽃 대궁 하나." 그렇다. 봄은 '희망'이라 하고, '출발'이라 하고, '생명'이라 한다. 봄은 정말 이렇게 삭여진 '열정'일 것이 분명하다. 李

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