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선생은 근엄하고 과묵한 분이셨습니다. 한마디로 장군스타일이었지요. 선생의 등에 업혀 다니던 그 시절이 바로 어제 일같이 느껴집니다"

박수근(1914∼1965)을 떠올리는 오상근씨(71·춘천시 석사동)의 두 눈속에는 벌써 유년시절의 기억이 가득했다.

오상근씨와 박수근화백의 인연은 일제시대 그의 아버지 오득영 선생에 잇닿아 있다.

박수근이 양구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오득영 선생은 그의 은사였다.

그것도 보통 은사가 아니라 소년 박수근의 미술에 대한 재능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보고 가난에 지쳐있던 제자를 일으켜 세워 오늘의 박수근이 있게 한 특별한 은인이었다.

오상근씨의 말.

"모든 사범학교 출신들이 다 그렇겠지만 아버님은 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박화백에게 미술의 기초를 가르치고 때때로 물감과 종이등을 사주기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스승과 제자의 특별한 인연은 양구에서 춘천으로 이어진다.

1935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는 빚 때문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21세이던 박수근은 아버지와 다름없던 오선생을 찾아 춘천으로 오게 된다.

이때 오선생의 집은 현재의 요선동 상가 부근, 박수근은 여기서 가까운 사창고개에 쪽방을 얻어놓고 약 1년간 최악의 빈곤속에서 그림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후 춘천을 떠났던 박수근은 15회부터 18회까지 鮮展에서 4회연속 입선한 후 25세 되던 1939년 다시 한 번 춘천을 찾아 1년여간 생활한다.

오상근씨의 말에 따르면 이때 박수근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소품들을 그려 선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어느 집 다락방 구석쯤에 박수근의 초기작들이 숨어 햇빛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춘천을 떠난 후에도 박수근은 매년 봄과 가을이 되면 스승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춘천을 찾았으며 소양강가로 나가 스케치를 즐겼다고 한다.

그럴때마다 박수근화백을 따라 나선것이 10살 남짓한 어린 오상근씨였다.

한손에 화구를 들고 등에 자신을 업은 채 강가를 성큼성큼 걸어가던 박수근, 평소에는 그렇게도 말이 없었지만 둘만의 시간을 보낼때 박수근은 마음 넉넉한 삼촌의 모습이었다는 게 오상근씨의 회고다.

오씨에 따르면 또 박수근화백은 스승이던 오득영선생에게 많은 그림을 선물했는데 요선동에서 약방을 했던 자신의 집과 오득영선생이 근무했던 화천 사내초교, 평창 도암초교, 춘천 소양초교 복도, 홍천 북방초교 등에는 박수근의 그림이 벽면마다 가득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6·25전쟁이 끝난 후 오상근씨는 선친의 근무지를 둘러 본적이 있다.

"폭격으로 없어진 학교도 있었고 건물은 남아있는데 그림은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도 판화작품을 비롯해 많은 그림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보니 다른 물건은 그대로 있었는데 그림만 없어졌더라구요. 참 아쉬운 일이지요."

오씨의 기억은 일단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

전쟁이 끝난 후 박수근은 춘천 요선동 다방 등에서 다섯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고 한다.

고미술 연구가 이만섭씨에 따르면 그의 그림을 사간 사람들은 춘천 '캠프 페이지'의 미군들.

이후 핸더슨이나 밀러부인도 마찬가지지만 신기하게도 박수근의 그림은 외국인들이 먼저 알아 본 셈이다.

이씨는 "박수근화백과 춘천의 인연은 그 기간은 짧지만 매우 끈끈한 것이었다며 많은 그림들이 가난했던 당시 사람들의 무지탓으로 사라져 아쉽다"며 "어딘가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박수근화백의 그림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민 화가' 박수근, 그는 양구가 낳고 춘천이 기른 '우리의 화가'였다.

어딘가 있을 그의 유작들이 발견돼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를 기대해 본다.



趙眞鎬 odyssey@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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