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忠)'이란 곧 '마음의 중심'이다.

어떤 상황에 처한다해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옳은 길을 가는게 '忠'인 것이다.

인간이 함께 모여 산 이후로 바람의 흔들림을 쫓아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꾸는 게 세상의 흔한 인심이지만 역사 이래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얄팍한 세태와는 반대로 모진 풍파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향긋한 노래의 씨앗을 뿌려' 후세에 전하는 사람들, 충의공 엄흥도(忠毅公 嚴興道)도 그들중 한사람이다.

정인지, 신숙주 등 세종과 문종의 성은을 입었던 이들 조차 세조의 쿠데타에 몸을 의지하는 현실에서 궁벽한 시골의 하급 관리 엄흥도가 보여준 의로운 용기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장한 일이었다.

엄흥도는 영월 엄씨 시조인 엄림의(嚴林義)의 12세손으로 출생과 성장기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부인 최씨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지금의 청령포 앞마을인 방절리에 살았던 것으로 전한다.

엄흥도가 역사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역시 단종과 관련해서다.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세조는 1456년 음력 6월 22일 정인지 한명회 권람 등의 사주로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로 유배시킨다.

어느날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든 엄흥도의 귀에 난데없이 희미한 곡성이 들려왔다.

곡성이 청령포에서 들려오는게 틀림없다고 여긴 엄흥도는 부인에게 "잠시 청령포에 다녀 오리다"라고 말하고 채비를 시작하자 부인은 "그곳에 가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합니다"라며 울며 만류했다.

그러자 엄흥도는 "내 비록 관직도 없는 몸이나 적막한 곳에서 홀로 지내는 어린 임금의 곡성을 듣고도 목숨이 두려워 모른 채 한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라 하겠소"라며 깊은 강물을 헤엄쳐 건너갔다.

인기척에 울음을 그친 단종은 강을 헤엄쳐 건너오느라 흠뻑 젖은 엄흥도를 보고 "옛 말에 초야에 선인이 있다더니 엄호장(嚴戶長)을 두고 하는 말"이라며 "내가 꿈에 六臣(사육신)을 만나 울던중 이제 그대를 보니 육신을 보는듯 하다"며 기뻐했다.

이후 엄흥도는 수시로 단종을 찾아뵙고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으며 단종의 서찰을 품고 한양에 있는 순정왕후를 찾기도 한다.

청령포에서 생활한 지 두달만에 대홍수로 단종은 거처를 영월읍내 관풍헌으로 옮기게 되는데 마침 엄흥도는 관풍헌 관리책임자로 임명돼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단종을 가까이 모시게 된다.

어느 날, 단종은 외로움과 한을 달래기 위해 즐겨 찾던 자규루(自規樓)에 올라 목메인 소리로 詩를 한 수 읊었다.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궐을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중에 이르렀구나/…'(하략)

이에 엄흥도는 한없는 충심에서 울어난 답시를 눈물로 노래하는데 쫓겨난 임금을 모시는 올곧은 마음과 손자같은 젊은이의 끝간데 없는 불행을 애?아하는 시골 늙은 촌부의 사심없는 순수함이 알알이 배어난다.

'…/육순의 작은 벼슬아치 충성을 다하고자 하거늘/왕께선 열일곱에 운이 어찌 그리 궁하신지요/높고 높은 하늘엔 밤마다 마음의 별이 붉고/위태로운 이 땅엔 해마다 눈물비가 붉습니다/…'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밀어낸 후 멀고 먼 영월땅에 유비시키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세조는 유배 1년4개월 만인 1457년 10월 마침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차마 사약을 내놓지 못하고 꿇어 앉아 흐느끼는데 이때 단종을 모시고 있던 貢生 하나가 공을 세울 심산으로 활시위에 노끈을 이어 단종의 목을 졸라 절명시켰다고 전한다.

역적으로 몰린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으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에 누구하나 손을 대지 못하고 애를 태웠다.

그러자 엄흥도는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수의와 관을 지게에 지고 아들 3형제와 동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집안 사람들이 옳은 일인 줄은 알면서도 멸문지화가 두려워 만류하자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 설사 어떤 화를 당한다해도 달게 받으리라"(爲善被禍 吾所甘心)라는 말을 남기고 시신을 수습해 선산인 동을지산(현재의 장릉)에 암장한다.

단종의 용포를 가지고 계룡산 동학사를 찾아 김시습과 함께 3년상을 치른 엄흥도는 아들 3형제와 뿔뿔이 흩어져 종적을 감추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200여년이 흐른 1669년, 송시열이 경연에서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등용토록 주청해 허락을 얻었다.

숙종 24년인 1698년에는 단종의 복위와 함께 엄흥도는 공조좌랑으로 추증됐으며 영조때인 1758년 다시 공조참판으로 가증됐고 1790년 정조는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등용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리기도 했다.

순조 33년인 1833년 다시 공조판서의 가증교지가 내려졌으며 1877년 고종은 그에게 '충의공'의 시첩과 교지를 내렸다.

이에앞선 정조 15년인 1791년에는 왕명으로 엄흥도의 위패가 사육신 등과 함께 장릉 배식단에 모셔져 제사를 지냈으며 그 전통은 현재에도 단종제를 통해 이어져 오고 있다.

'云寶貨 用之有盡, 忠孝 享之無窮'

공자께서 이르기를 "보화는 쓰다보면 한정이 있지만 충효로 생기는 복은 영원히 누릴 수 있다."고 했으니 엄흥도는 삶과 죽음을 통해 성현의 말씀을 입증한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엄흥도의 충절이 없었던들 어찌 오늘날의 영월이 있다고 어느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충절의 고장, 영월'이 오직 충의공 엄흥도 한 사람의 공으로 비롯됐다고 해도 전혀 지나친말이 아니니 충의공은 실로 '영월의 아버지'인 것이다.

충의공이 보여준 의로운 용기는 영월주민의 마음속에 면면히 이어져 오늘도 장릉의 낙랑장송과 함께 한껏 푸르니 각박한 세태의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1726년(영조 2년) 영월부사 윤양래가 쓴 엄흥도의 묘비는 이렇게 전한다.

'태화산이 무너지고 금수(동강)의 물이 마를지라도 그대의 이름은 길이 후세에 남아 천추에 빛날 것이며 해와 별같이 멸하지 않을 것이다.…'




趙眞鎬 odyssey@kado.net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