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漢巖선사(1876-1951)는 근세 불교사의 최고 선승은 물론 특히 강원도 불교계의 선풍을 일으킨 주역.

일제시대 네차례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방한암 선사의 수행 면모와 선 사상, 맑은 인품은 후학들에 큰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단정히 앉아서 열반에 든 이른바 불가에서 말하는 좌탈한 선승으로 세수 76세, 법랍 54세로 열반할때 까지 일생동안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선승으로서의 수행및 지도를 통해 최고의 선사로 꼽힌다.

한암선사는 일제시대 세차례, 해방후 한번 네차례 종정으로 추대됐다.

1929년 1월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7명의 교정중 한명으로, 두번째는 1935년 3월 조선불교 선리참구원(선학원)서 개최된 조선불교 수좌대회에서 조선불교 선종의 3명의 종정(혜월 만공 한암)중 한명으로, 세번째는 1941년 6월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하면서 종정으로, 해방후 1948년 초대 교정 박한영스님 입적후 6월 30일 제2대 교정으로 추대된 것이다.

이처럼 종정제도가 생긴이래 일제시대 17년과 해방후 3년간 등 20년간 종정직을 역임하면서 불교계의 최고 지도자로서 선을 진작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또 종정에 지위에 있으면서도 일체 명예에 연연치 않았고 세간과 출세간 어디에도 관여하지 않으면서 오직 참선과 지도에만 전념했다. 성철스님(1912-1981)이 1981년부터 12년간 종정직을 역임했지만 한암선사에 미치지 못한다.

한암선사의 속성은 온양 방씨. 한암(漢巖)은 법호이며, 이름은 중원(重遠)이다. 1876년 3월 27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는데, 남한이 아니라 이북지역으로 전해진다. 조부 고향은 평안남도 맹산인데 과거를 보기위해 화천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方箕淳, 어머니는 선산 길씨. 부친은 한학자이며 천주교 신자였다. 3형제중 장남으로 막내 동생 역시 우일(愚一)이란 법명을 가진 스님이었다. 9세때 서당에서 '사략(史略)'이란 역사책을 공부하던중 '태고에 반고씨 이전에 누가 있었을까?'에 의문을 갖던중 22세때 금강산 여행을 하면서 종교적 감흥에 젖었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행름 화상을 은사로 출가 득도, 신계사 보운강회에서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읽다가 1차 깨달음을 얻었다. 24세때 청암사 수도암 경허 선사를 스승으로 인가를 받았다.

30세때(1905년) 통도사 내원선원의 조실로 추대받아 5년간 대중을 지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평남 맹산 우두암에서 보림했으며 건봉사 만일암 선원 조실(1921∼1923년) 서울 봉은사 조실(1925년)로 선수행과 지도에 힘썼다. 그러다 유명한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1년간 개성과 경기 광주 봉선사를 거쳐 1926년 50세에 오대산에 이르렀다. 잠시 중대에 머문 후 상원사로 옮겨 불국사 참배와 치아 치료를 위해 경성에 간 것 두차례를 제외하고 입적할때까지 27년간 오대산에 주석하면서 산문을 나오지 않으며 선풍을 진작했다.

근세들어 오대산 상원사 선원이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한암선사가 오랫동안 주석하며 선풍을 진작했기 때문.

상원사 선원은 오직 선만을 할뿐 다른 것이 없는 순수한 선도량이었다. 상원사 조실 한암선사는 새벽3시에 일어나 참선 예불 공양을 대중과 함께 했고 조실방이 있어도 가지 않았다. 앉아서 화두 드는 것만을 오직 일로 삼았다. 대중방에서 오뚝하게 앉아 선정에 들거나 조사 어록에 대한 법문을 했다. 언제나 큰 방에 앉아 참선을 하고 있으니 대중이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 공양후 꼭 오가피차나 마가목차 등 차를 마시는 각별한 가풍이 있었는데, 차마시는 시간은 한암 선사의 법문을 듣는 시간이었다. 대중들이 다 함께 큰 방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면서 한암 선사의 강의를 들었는데, 법화경 금강경 기신론 원각경 등을 가르쳤다. 한암의 명성을 듣고 전국의 선승들이 모여들었다.

흔히 선가에서는 '먼저 경을 보고 그 다음에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는 사교입선론이 보통인데, 한암선사는 그 반대 였다. 철저히 선 우선 입장이었다. '선을 해서 이치를 통하고 나면 경 보기는 어렵지 않다. 뜻을 얻으면 글은 저절로 알게된다'고 강조했다. 뿐만아니라 '깨달은 뒤의 조심은 깨닫기 전보다 더욱 중요하다'면서 '만약 깨달은 뒤에 수행을 정밀히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 여전히 생사에 유랑하여 영영 헤어나올 기약이 없다'고 하면서 깨달음 후의 보림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참선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불공의식을 익혀서 마지올리고 내리는 법은 알아야하며, 불조의 어록은 혼자 뜯어볼 정도의 글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암선사의 인품에 관한 일화는 많다.

일제시대때 총독부에서 준 화려한 가사는 손 끝도 안댔다고 한다. 또 아침 저녁 예불을 다하고, 채소 가꾸고 감자심고 거두기 등 대중 운력엔 꼭 참석했다는 데서 성품을 짐작할수 있다. 한국전쟁때 국군이 상원사가 적에게 이용될 우려가 있다며 소각키시려고 하자 가사 장삼을 입고 법당에 들어가 불을 지르라고 해 결국은 상원사를 보존한 사건은 유명하다.

경허선사는 제자 한암의 성품에 대해 '그의 성행은 순직하고 또 학문이 고명해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에 처음만난 사람같이 생각되었다'고 적었다.

한암선사는 평소 글로 남기는 것을 꺼렸는데. 선의 본질과 수행방법에 있어서 명쾌하게 규명한 '선문답 21조'는 수행자들의 영원한 보감이 되고있으며 '승가 5칙'을 제정하고 '선원'과 '금강저' '불교' '신불교' 등에 잡지에 '해동초조에 대하여' '항상 새로운 날' '원단칙어' 등을 발표했다. 유일한 문집인 '일발록'은 1947년 상원사 화재때 소실 됐으며 1995년 문도들로 구성된 한암문도회에서 '한암일발록'을 편찬했다.

한암문도회(회장 김현해월정사주지)는 매년 음력 3월 27일 탄신 추모행사를 봉행하고 있으며 1959년 수제자 탄허스님등이 상원사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올해 비를 새로이 건립해 탄신일인 1일 추모행사와 함께 비 제막식을 개최한다. 상원사(주지 석정념)에서는 최근 적멸보궁을 성역화하는 것과 함께 선원을 새로 건립해 새천년을 맞아 선풍을 새롭게 진작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朴美賢 mihyunp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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