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때 거란족의 침입을 슬기롭게 막은 고려 16충신으로 횡성 최고의 역사인물로 손꼽히는 趙沖(조충). (이수변 충임)

趙沖은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 출신으로 고려 명종때 재상인 부친 趙永仁과 아들 趙季珣과 더불어 삼원수(三元帥)로 불리는 고려시대 문무를 겸한 인물이다.

예전에는 공근면 상동리에 후손들이 사당을 짓고 매년 봄 가을에 제향을 올려왔으며 이곳의 지명을 ‘삼원수골’이라 부른다.

趙沖의 묘소는 지금 북한땅인 개성군 상도면 연동의 태조 왕건 왕비제릉 서편 언덕에 있었으나 1948년 지금의 위치인 횡성군 정암리로 옮겨왔다. 지난 88년에는 趙沖을 모신 사당 세덕사를 건립, 횡성얼 차원에서 그를 기리고 있다.

지난 88년부터 성역화사업을 추진해왔으나 사당에는 영정없이 위패만 있으며 홍살문 재실 등 묘역정비가 제대로 안돼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다.

고려사 연전 제16권에는 趙沖은 생후 한달만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어릴때부터 효성이 지극해 孝童이라고 불리웠다고 전해진다. 또 횡성 趙씨 족보에 따르면 趙沖은 공근면 상동리 자하봉아래 있는 굴바위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에서 500여m 떨어진 곳을 趙村이라 부르고 이곳에서 300여m 아래쪽에 있는 仙降停에서 이들 부자가 시를 읊었다고 적혀있다.

趙沖은 장군으로 불리고 있지만 시호가 문정공으로 아버지 문경공 아들 광정공으로 그들이 모두 문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趙沖이 활약한 당시는 崔충헌의 무단정치가 시작된 시기로 문신으로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비록 활발했다 하더라도 감춰졌을 것으로 보인다.

趙沖은 문과에 급제 한 후 예부상서를 거쳐 1216년(고종 3년)에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로서 상장군을 겸임하며 거란족을 물리쳐 외침을 막아낸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문신으로 상장군을 겸한 예는 흔치않은 것으로 趙沖이 문무를 겸한 인재라 하여 특별히 임금이 제수하였다고 한다.

고려사 열전에서도 趙沖은 문무를 겸비, 특별히 두 관직을 주게 됐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그의 이같은 입신을 최씨 정권의 혼잡한 정계를 틈타, 비정상적인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라 폄하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최충헌 집권의 초기에는 정중부 경대승 등에 의해서 문란해진 정가를 바로 잡는데 노력, 어느 정도 성공을 보고 있는 때고 趙沖이 그의 정도를 지켜 최씨 무리에 가담하지 않았던 때이다.

그가 거란족과 싸움이 끝난 뒤 서경(평양)에 남아 버티면서 최충헌과 한때 맞섰던 것은 이같은 것을 입증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뒤에도 趙沖에 대해 공훈을 주는 정도가 소홀, 맞서게 되었다고 고려사 고려사 절요 동국전란사에 기록돼 있다.

이는 곧 그가 세도가나 불량배와 결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곧은 절개와 충성심을 엿보게 한다.

역사상 趙沖과 같은 인물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의 고고했던 성품과 행동은 무신 집권기의 혼탁한 세상에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기둥역할을 했음을 후세는 전하고 있다.

그가 고고한 성품과 곧은 행동으로 일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지력이 한 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향 공근면 상동리에서 외로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길들여진 것이라는 게 후세 역사학자들의 평.

그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거란족의 침입을 막아 낸 것.

고려는 개국 후 북진정책을 세워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 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거란족이 고려를 침입한때는 고종당시의 일로 특징적인 것은 정규 군대의 침입이 아니라 가족을 동반한 침입군이어서 엄격하게 말하면 거란족의 이동 성격이 짙었다.

처음 거란족이 침입한때는 고종 3년 1216년으로 평안도 방면으로 들어와 평안도는 물론 황해도 지방을 짓밟고 당시 서울이던 개성을 피해 철원으로 침입, 양평을 거쳐 원주에서 큰 싸움을 벌였다.

9번의 싸움 끝에 침입한 거란족은 횡성 홍천 춘천을 침입했으며 원주를 유린하다 고려군에 쫓겨 제천 영월 평창 강릉 양양을 거쳐 함경도를 지나 여진의 땅으로 들어갔다.

거란족의 침입은 강원도 전란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사건으로 도민들의 희생도 많았다.

특히 강릉사람들은 거란족의 만행을 피해 울릉도로 피난가다 풍랑을 만나 죽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趙충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승전과 패전을 연속,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면당한 일도 있었지만 다시 복직됐다.

이때 패하고 면직된후 읊은 시에서 그의 恨과 애국심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萬里霜蹄容一蹶 (만리길 서리굽이 한번 미끄러 졌으니)

悲鳴不覺換時節 (병마의 비명소리에 시절 바뀐 줄 몰랐노라)

尙敎祖父更加鞭 (아마도 할아버지의 본을 받아 다시 주마에 가편하고)

踏躪沙場 (재방변에 崔)古月 (모래톱에 유린하는 오랑캐를 꺾어나 보자)


이런 가운데 趙沖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거란족이 재침입한 고종 5년 1218년으로 그는 서북면 원수로 임명돼 김취려 정통보 오수기 등의 장군을 앞세우고 평안도로 침입한 적을 맞아 싸웠다.

거란족은 이때 처음 침입했을 때처럼 남쪽으로 내려 가려했지만 趙沖의 탁월한 지략에 말려 강동성으로 도피, 겨우 거란족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그쳤다.

전쟁이 끝난후 趙沖은 거란족의 왕자를 비롯, 지도층은 그 자리에서 처형했지만 그 외의 5만여명의 거란족을 우리나라 곳곳에 분산시켜 살게 했다. 이처럼 거란족이 몽고족의 한부류임에도 몽고에서 살지않고 고려에서 터전을 마련한 것은 어제의 적을 한 가족으로 맞은 趙충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후 거란족의 마을이 생겨 이를 거란장으로 불렀다.

趙충은 개선하여 정당문학 판예부사(政堂文學判禮部事)에 오르고 곧이어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 평장사 수국사(守太尉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修國史가) 더해졌다.

말년에는 독락원(獨樂園)을 만들어 사대부들과 금주(琴酒)로써 즐기다 1220년 50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趙충이 죽자 고려 조정에서는 3일동안 조회를 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이 추증되고 고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조선시대 이르러 고려 태조 고종 문종 원종과 함께 고려 충신 16인 열위의 한분으로 승의전에 배향됐다.

趙충과 연관된 지명인 횡성군 공근면 부창리에 있는 망제(望祭)머리는 그의 부음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려 제사를 지낸 곳이고, 배행(拜行)고개는 3원수가 떠날 때 배웅을 하던 곳이다. 그리고 현재 趙충의 묘역이 있는 망백은 벼슬에 오른 후손들이 조상께 아뢴다는 뜻으로 전해온다.

횡성군은 지난 88년 趙충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를 건립했으며 올해부터 2002년까지 횡성얼 선양차원에서 16억원을 들여 영정 제작 묘역이전 시설물 건립 등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橫城= 金義道 yido@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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