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존여비 관념이 생활 깊숙히 뿌리 내린 구한말, 부엌과 안방의 여성이 '안사람 의병단'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나서 활동한 것은 당시의 금기를 깨는 행동이었다.

금기를 깨고 당당히 일어선 여성은 서울이나 부산, 대구 너른 도시에 사는 여성이 아니었다. 강원도 춘천 산간마을에 사는 尹熙順선생(1860∼1935)이었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쏘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 나라 성공하면 우리 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이 노래는 윤희순이 여성들의 구국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지은 '안사람 의병가'이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 노래를 지은 뒤 '자주 읽어보고 외워 두고 하여라'라는 메모를 해 둘 정도로 결연했다.

본관은 해주, 尹翼商의 딸로 서울(현재 경기도 구리) 태생인 윤희순은 16세에 위정척사파의 선비 춘천시 남면 柳弘錫(1841-1913)의 장남 柳濟遠(1859-1915)과 결혼했다. 천성이 씩씩하고 활달한 것으로 알려진 尹熙順은 결혼 전 시어머니가 작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시아버지가 출정할 때 함께 종군하겠다고 간절히 요청했다. '국가의 존망이 당할 때 구국 대열에 참여하는데 어찌 남녀의 차별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집안 일에 힘쓸 것을 당부하자 그때부터 집 뒤에 단을 모으고 10여개월 매일같이 의병진이 성공할 것을 항상 기원하면서 의병들이 올 때마다 음식과 옷을 조달했다. 궁핍했던 당시의 사정에 비춰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안사람 의병가' '안사람 의병가 노래' '병정 노래' 등의 노래를 창작해 보급하면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여성들의 의병활동 참여를 이끌어 냈다. 왜병들이 尹선생에게 위압적으로, 때로는 달콤한 말로 시아버지와 남편의 거처를 추궁할 때에 강철같이 강경했다고 한다.

尹熙順은 여성 특유의 강한 애국심과 민족적인 자부심이 담긴 '왜놈 대장 보거라' 라는 경고문을 쓰며 여성의병단 출현을 예고한다.

'너희 놈들이 우리나라가 욕심나면 그냥 와서 구경이나 하고 갈 것이지, 우리가 너희 놈들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느냐. 우리나라 사람 이용하여 우리나라 임금님을 괴롭히며 우리나라를 너희놈들이 무슨 일로 통칠한단 말이냐. 아무리 유순한 백성이라 한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알았단 말이냐. 절대로 우리 임금님을 괴롭히지 말라. 만약 너희 놈들이 우리 임금님, 우리 안사람네들을 괴롭히면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1907년 전국 각지에서 정미의병을 일으켜 저항했는데, 춘천서는 시아버지 柳弘錫이 의병대장이 돼 춘천 진병산(陳兵山) 의암소(衣岩所)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서 싸웠다. 의병 600여명과 의인 친척 남녀 노소가 모두 모여 가정리 여우내골에서 의병훈련을 하며 화약과 탄환을 만드니 尹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 춘천시 남면 마을에서 30여명의 여성들을 동원해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도왔다. 또 쇠와 구리를 구입해 화약과 탄알을 제조해 의병에게 수송했으며 식사와 빨래 뒷바라지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의 '군자금 명단'을 보면 '남종댁(南宗宅) 20兩 ·항곡댁(恒谷宅) 10량 65전 ·계양소댁(桂陽小宅) 10량 ·지산소댁(芝山小宅) 12량 ·오댁 5량 ·여아댁 1량 ·죽산댁 1량 ·반이댁 2량 ·이곡댁 5량 또 5량 ……' 으로 기록돼 있어 여성의병들의 손길이 새삼 느껴진다.

하지만 일제에 나라를 강점당하자 이듬해인 1911년 시아버지, 남편과 함께 낯설은 만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망명 2년뒤인 1913년 시아버지, 2년후 남편마저 세상을 등지자 화전을 일구면서 악전고투하며 柳敦相(1894-19354)과 敏相 두아들이 조선독립단에 참여해 독립 활동을 하는 것을 뒷바라지 했다. 왜적이 가족을 몰살시키기 위해 尹熙順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다 1935년 7월 19일 중국 무순에서 대한독립단 청년들에게 강의하던 장남 柳敦相이 일본경찰에 체포당해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자 직접 땅을 파서 아들을 묻고는 그 울분을 이기지 못한 채 식음을 전폐하다 12일만인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록을 남기고 이국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漢族 친구들에 의해 만주 해성현(海城縣) 묘관둔(苗官屯) 북산(北山)에 안장됐으며 1994년 비로소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향리인 남면 관천리 선영에 안장됐다. 정부에서는 뒤늦게 1990년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지역사회에서는 한국여성예림회 강원지회에서 90년대들어 추모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춘천시립도서관 후원에 윤희순 상, 윤희순 생가터에 해주윤씨의적비, 묘소에 애국선열윤희순여사사적비 등이 건립돼있다. 춘천시 남면 일대에 유적지가 있으나 보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朴漢卨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의 서찰을 통해 추적해보면 윤희순선생이 남장을 하고 충주로 의병 원정을 나서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고 피력했다.

윤희순이 남긴 글에 대한 문학적인 조명이 이뤄지고 있는데, 朴敏一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윤희순이 직접 짓고 쓴 '안사람 의병가' 등 13편은 역사를 문학으로 수렴한 역사인식과 문예적 역량은 최초의 여성의병가로 자리매김되며 한국의병문화사의 넓이와 크기와 깊이를 튼실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준다"고 평가했다.

강영심 박사(이화여대 사학과 강사)는 "안사람 의병단은 그 성격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군이라 지칭할수 있으며 이들의 구국정신은 일제하 항일 여성운동으로 이어져 독립전쟁론으로 맥을 이었다는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수 있다"고 지적했다.

朴美賢 mihyunp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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