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옛 사람들의 생애를 더듬다보면 그 출생부터가 일단 범인들의 기를 질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하늘로부터 瑞氣가 내렸다’든지 ‘태몽에 용이 날아들었다’는 등등의 말들이 그것.

梅月堂 金時習의 생애 또한 범상한 것은 아니어서 일반의 기를 질리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것이 명백한 역사적 실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예들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불세출의 신동에서 奇人, 義人, 혹은 狂人까지. 그 무엇이 600여년의 세월동안 매월당의 이름을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시키고 또 그를 사랑하게 만들게 했을까.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강릉, 자는 悅卿, 호는 梅月堂, 법명은 雪岑이다. ‘時習’이라는 이름은 ‘論語’의 첫 귀절인 ‘學而時習之’에서 따왔다고 전해지는데, 과연 그 이름처럼 난 지 8개월만에 글자를 알았고 3세때는 글을 지을 수 있었으며 5세때는 이미 문리가 틔였다고 전한다.

세 살때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읊기를 ‘비도 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진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 하니 주위 모두가 신통하게 여겼다.

다섯 살때는 두부를 보고 ‘타고난 품성은 두 돌 틈에서 받았는데 둥글고 빛나는 것 달이 동쪽에서 솟은 듯. 龍 삶고 鳳 구운 것에는 못미치지만 머리 빠지고 이빨 벌어진 노인에게 제일 좋겠지’(稟質由來兩石中 圓光正似月生東 烹龍포(火변에 包)鳳雖莫及 最合頭童齒豁翁)라고 읊자 그 명성이 온 나라를 뒤흔들어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五歲’라 칭하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은 명성은 궁궐에까지 전해져 세종이 직접 그를 불러 시험한 후 훗날 크게 쓸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온 나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그의 인생은 세조의 쿠데타로 한순간에 뒤바뀐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때를 기다리던 그는 21세때 쿠데타 소식을 듣자 책을 모두 불사른 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돼 일생의 대부분을 정처없이 떠돌게 된다.

이때부터가 훗날 ‘奇人 또는 狂人’으로 알려진 김시습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이다.

거짓으로 미친 체하고 세상을 떠돌던 그는 임금인 세조가 불러도 응하지 않았으며 길을 가다 세조편에 붙은 고관들을 보면 면전에서 심하게 모욕 주기를 여러번 했지만 그의 절의와 명성을 두려워한 고관들은 감히 나서지 못한채 피하기 바빴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백성들의 일하는 모습을 나무로 깎아 한참 바라보다 울기를 반복했으며 조정의 일이 잘못 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백성들 걱정으로 여러날씩 통곡했다’는 기록은 그의 일생을 관통했던 일종의 ‘거침없는 후련함’보다는 비록 시대와의 불화로 세상을 등졌지만 마음의 뿌리는 언제나 백성들 속에 깊게 박고 있었던 한 지식인의 불행한 삶을 떠올리게 해 더욱 애처롭다.

한편 그의 천재성은 기행중에 오히려 빛을 발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 15권에 이르는 시집으로 전하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인간, 천재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까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방대하며 특히 ‘금오신화’는 심오한 인간정신, 고도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높은 예술성으로 국문학사에 큰 획을 긋고 있다.

그러나 ‘나뭇잎에 시를 적어 물에 흘려 보냈다’등의 기록을 볼때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은 김시습의 저작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는 문인일뿐 아니라 대 사상가이기도 했다. 儒佛仙의 3道를 꿰뚫고 있던 그는 우리나라에서 우주만물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시도한 최초의 철학자로 훗날 서경덕, 최한기로 이어지는 ‘氣철학’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말년의 그는 춘천 청평사와 외가가 있는 강릉, 설악산 오세암 등을 배회하다가 59세때인 1493년 충청도 홍성 무량사에서 불행한 천재의 일생에 끝점을 찍는다.

김시습은 세상을 뒤덮고도 남을 재능을 지닌 불세출의 천재였지만 세상의 옳지못함을 지나치지 못해 결국 시대와 불화했던 체제밖의 지식인이었다. 비록 일생을 아웃사이더로 보내야 했지만 고결한 인품, 굳센 지조, 놀라운 천재성은 세월이 갈수록 그에 대한 존경의 깊이를 더하게 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 李山海는 ‘매월당집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하늘과 땅사이에 청명하고 정수한 기운이 사람에게 모였으니 本朝의 신 김시습이 그러한 사람이라…(중략)…하늘은 이런 재목을 세상에 내고도 그 시대를 맞춰주지 않았으니, 아아! 하늘이 과연 무슨 마음에서 이렇게 했던가?’

趙眞鎬 odyssey@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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