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申崇謙장군(?∼927)은 고대사상 춘천이 낳은 가장 걸출한 인물로 꼽힌다.

통일 신라 말기 민심이 흐트러진 시대에 강원지역의 농민을 배경으로 들고 일어난 인물이 바로 궁예였다. 당시 申崇謙도 뜻을 같이하게 된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는 나중에 申崇謙을 비롯한 왕건 옹립 세력들에게 축출당하는데, 그 과정에서 빼놓을 수 있는 인물이 申崇謙이다.

신숭겸은 고려 건국의 1등 공신일뿐 아니라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자신을 던져 태조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936년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을 이루고 역사의 장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앞서 줄곧 왕건과 같이 남정북벌하며 고려 통일의 기초를 닦아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특히 신숭겸은 지방의 토호세력이나 높은 관리 출신이 아닌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으나 태어날 때 천부적인 용맹성과 지략, 충절로 고려 건국사 및 후삼국 통일 역사에 있어서 영웅의 위치에 올라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는다. 출생 연대가 명확지 않다는 점에서 당시 평범한 농민 출신으로 보는 것이다.

요즘 40·50대 남성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왕건을 보좌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 ‘能山’인데, 이 능산은 신숭겸의 첫 이름이다. 신숭겸이라는 이름을 갖고 관향으로 황해도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 것은 고려 태조가 하사한 것으로 본관으로 삼게 된 전설이 전해온다. 장절공(壯節公)은 태조 왕건이 내린 시호.

신숭겸의 출생설은 두가지이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 많은 기록에 신숭겸은 춘천 사람으로 명시돼 있다. 곧 당시 지명인 광해주인(光海州人)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라도 곡성 태생으로 어릴 때 춘천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을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 자료는 춘천에서 태어났든 그렇지않든 춘천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기록에 따르면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고려사 中 열전) ‘용맹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항상 정벌에 종사하여 공이 있었다’(동국통감) 로 표현돼 있어 신숭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918년 6월 신숭겸은 궁예가 통치하던 태봉국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협력해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옹립해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이후 927년 7월 합천(당시지명 대량성)을 공략해 후백제의 장군 추허조 등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신라가 후백제에 공격을 당하자 급히 고려에 원조를 요청, 신숭겸은 고려 태조 10년 927년 대구 달성 공산 부근에서 후백제의 견훤 군대와 대혈전을 벌이게된다. 태조가 후백제군에 포위돼 위급하게 되자 장수의 평복으로 갈아입히고 독좌암으로 피신시킨 뒤 대신 金樂과 함께 전력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다. 이 때 신숭겸이 왕건으로 가장해 어가를 타고 싸웠기에 견훤이 왕건인 줄 알고 시체의 머리부분을 전리품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장례때 머리를 만들어 안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숭겸은 극적인 삶을 산 영웅이었기에 출생부터 출세 과정, 전사 과정, 묘역에 안장되기까지는 물론 사후의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화와 전설이 따라다닌다. 춘천시 서면 장절공 신숭겸 묘역은 생생한 전설이 살아숨쉬는 유적이다.

한편 신숭겸과 관련해 소중한 문학작품이 남아 전하고 있다.

1120년(고려 예종 15년) 10월 예종은 신숭겸과 김낙을 추도해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당시 예종이 평양(당시 서경)에 행차해 팔관회가 열렸을 때 그 자리에 개국 공신 신숭겸과 김락의 가상(假象)을 만들어 참석하게 한 가상희를 관람하면서 그들의 충절을 추도해 시(詩)와 가(歌)를 지었다.

歌는 이두식 표기로 된 향가 형식의 노래로 8구체를 4구씩 2분해 지었는데, 국문학사에서는 8구체 향가의 계통을 이었고 이두로 되어있어 정과정곡과 함께 향가 형식의 노래가 고려 중기까지 남아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중요 작품이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임을 온전하옵게 한/마음은 하늘끝까지 미쳤는데/비록 넋은 갔어도/삼으신 벼슬만은 또 하는구나//바라보니 알겠노라/그때의 두 공신이여/오래도록 곧은/자취는 나타나 빛나는도다’

팔관회에서의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의 가상희 유래는 깊어 이 역시 전설로 전해온다.

신숭겸이 전사한 이듬해에 태조 완건은 대궐 안에서 팔관회를 열었는데, 여러 신하들과 나라일이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나라와 자신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두 전사공신인 장절공 신숭겸과 충장공 김락 장군이 떠올랐다. 이들의 가상을 만들게 한뒤 생전 처럼 조복을 입힌 다음 윗자리에 앉히고 주안상을 올리게 했는데, 이때 짚으로 만든 장절공의 가상 인형이 술잔을 받아마셨으며 산 사람처럼 일어나서 춤을 췄다는 것.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들어 신숭겸의 충의를 추모하는 조선 역대 왕의 교령문을 모은 활자본인 ‘열성수교’라는 책이 전할 정도로 충덕의 인물의 표상이다.

장절공 묘역은 1975년부터 3년간의 작업 끝에 단장돼 1976년 강원도기념물 제21호로 지정돼 있으며 한국 4대 명당 지로 꼽히는 이곳은 영정각과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있다. 1805년(조선 순조 5년)에 세운 신도비문은 조선말 세도가로 유명한 영안부원군 金祖淳이 지은 것이며 묘갈지에는 해공 신익희의 글씨가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장절공 영정은 1975년 운보 김기창화백이 그린 것이다. 서면 신매리에 1650년 조선 효종 6년에 강원도관찰사 박장원이 창건한 도포서원(道浦書院)이 있어서 그의 공적을 기념했으나 조선 고종 서원훼철령때 없어져 그 액판만 묘비각에 보관돼 있다.

장절공 관련 유적은 춘천을 비롯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崇義殿) 황해도 평산(太師祠 東陽書院) 전남 곡성(龍山壇 장군단 德陽書院) 경남 사천시 온정리(景白祠) 경북 대구(表忠祠 殉節壇 智妙寺 影閣遺墟碑) 등 남북한을 통틀어 곳곳에 그를 기리는 유적이 있다.

朴美賢 mihyunp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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